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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행] 방사능 괴물보다 잔인한게 인간이다, 메트로 유니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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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지하철을 무대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메트로 유니버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모스크바 지하철을 무대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메트로 유니버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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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대중적인 설정이 됐다. 그렇다 보니 슬슬 엇비슷한 분위기 작품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핵 전쟁으로 사막이 된 황무지, 쓸 만한 물건을 찾아 파괴된 도시를 뒤지는 고철 수집가, 돌연변이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투 등… 어디서 본 듯한 것들만 나오니 이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내에서도 새로운 것을 보고 싶다는 요구가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바로 최근 영화화 무산으로 많은 안타까움을 자아낸 러시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메트로 유니버스’다. 무산된 이유도 영화 각본이 ‘메트로 유니버스’의 독특한 색채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데, 일단 무대가 사막 같은 황무지가 아닌 좁고 어두운 지하철역으로 한정된 점에서 확실히 ‘폴아웃’ 같은 주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들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메트로 유니버스’ 이야기는 대부분 폐쇄된 지하철역 내부에서 진행된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메트로 유니버스’ 이야기는 대부분 폐쇄된 지하철역 내부에서 진행된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실제로도 ‘메트로 유니버스’ 풍미는 자못 독특하다. 그 진가는 이 세계관이 보여주는 인간성의 민 낯에 있다. 군국주의, 인종차별, 부의 재분배 등 러시아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핵 전쟁 후 지하철역에 숨어 살아가는 생존자 공동체를 배경으로 사실적이고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들이라고 이런 주제를 안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메트로 유니버스’ 만큼 진지하게 다룬 작품은 흔치 않다.

소설과 게임을 오가며 주가를 높이고 있는 ‘메트로 유니버스’는 어떤 내용일까? 이 기회에 알아보자.

기자 출신 작가의 러시아 사회상 담은 판타지, 게임이 되다

‘메트로 유니버스’ 아버지 드미트리 글루홉스키 (사진: 게임메카 촬영)
▲ ‘메트로 유니버스’ 아버지 드미트리 글루홉스키 (사진: 게임메카 촬영)

미국에 ‘폴아웃’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메트로 유니버스’가 있다고 할 정도로 ‘메트로 유니버스’는 전세계적인 인지도를 끌고 있다. 성공 요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가장 큰 요인은 보는 순간 금방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를 듯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작품 내 사회상을 꼽을 수 있겠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가 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메트로 유니버스’는 러시아 SF 판타지 작가 드미트리 글루홉스키의 소설로 시작했다. 러시아 지식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글루홉스키는 10대 때부터 다양한 문화를 접한 덕분에 넓은 안목과 풍부한 상상력을 갖줬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5세에 이미 창작물 집필을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 ‘메트로 2033’ 역시 이 시절부터 조금씩 축적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그 시작은 실제로 있는 러시아 지하철 방공호에 대한 괴담이었다.

냉전시절 소비에트 연방은 미국과의 핵 전쟁을 대비해 주요 도시들에 지하 방공호를 구축했다. 특히 모스크바 지하철은 188개에 달하는 수많은 역이 194마일 길이의 터널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하 복합시설인데, 이처럼 방대한 규모다 보니 온갖 괴담이 있다. 정부 요인만 출입할 수 있는 비밀 방공호로 이어진 ‘메트로-2(혹은 D6)’이 있다거나, 이 ‘메트로-2’로 가는 길에 많은 무기가 감추어진 군 시설이 잠들어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었다.

온갖 괴담이 무성한 실제 모스크바 지하철도 (사진출처: 러시아 비욘드)
▲ 온갖 괴담이 무성한 실제 모스크바 지하철도 (사진출처: 러시아 비욘드)

어린 시절 이러한 도시괴담을 흥미롭게 본 글루홉스키는 여러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습작을 거친 끝에 18세에 모스크바 지하철역을 무대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메트로 2033’을 쓰기 시작했다. 핵 전쟁 이후 생존자들이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상에서 지하철 역으로 대피하여 살아가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다룬 소설이었다. 학업을 마친 그는 유로뉴스라는 언론에서 기자로 일했는데, 이 시기 글쓰기 기술을 다듬은 그는 ‘메트로 2033’을 제대로 연재하기 시작했다.

‘메트로 2033’의 특징은 핵 전쟁 후 고립된 모스크바 지하철역이라는 구체적인 상황과 공간 속에, 생존자들이 사상적이거나 경제적 이유로 파벌을 나누고 대립과 공존을 이어가는 가상 사회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줘 인기를 끌었다. 특히 ‘메트로 2033’에는 실제 러시아에서도 큰 사회문제인 군국주의, 인종차별, 빈부갈등 등을 그대로 담아, 실제 사회가 핵 전쟁 이후 지하철역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재구성된 듯한 예리한 사실감을 담아낸 점이 특징이었다.

2002년 집필 초기에 글루홉스키는 작품을 블로그에 공개한 후 독자 요청으로 전개를 이어나가는 인터랙티브 소설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주인공이 임무 실패 후 사망하는 비참한 줄거리 등으로 곤란을 겪다, 2005년에 간신히 뜻이 맞는 출판사를 만나 플롯 전반을 수정해 출판에 성공했다. 이후 그는 기자 일을 그만 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며 ‘메트로 2033’ 시리즈를 집필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한국에도 정식 출간된 ‘메트로 2033’ 표지 (사진출처: 제우미디어)

‘메트로 2033’은 공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결합한 ‘사실적 판타지’를 강점으로, 유럽권에서 천천히 팬 층을 넓히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코펜하겐에서 열린 SF소설 행사 유로콘에서 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후속작인 ‘메트로 2034’가 출간됐다. 이렇게 인기를 얻기 시작한 ‘메트로 2033’은 출판사 지원으로 여러 명의 작가가 글루홉스키 감수 하에 같은 세계관으로 소설을 쓰는 ‘메트로 유니버스’ 프로젝트로까지 확장됐다.

하지만 초기에 ‘메트로 2033’은 동구권 너머에서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출판 조차 힘들었다. 디지털 트렌드라는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글루홉스키는 처음 미국 출간을 시도했을 때 대부분의 미국 출판사들이 ‘메트로 2033’에 대해 “너무 기이하고, 낯설고, 특이하다” 는 반응을 보이며 출판을 거부했다고 이야기했다. 러시아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사회상을 담은 만큼, 북미에서의 반응을 점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해외시장에 돌파구를 뚫어준 기회는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우크라이나 게임 개발업체 4A 게임즈가 ‘메트로 유니버스’ IP로 게임을 제작하고 싶다는 의향을 전달해온 것이었다. 당시 4A 게임즈는 ‘스토커(S.T.A.L.K.E.R.)’ 시리즈로 유명한 또 다른 우크라이나 게임개발사 GSC 게임 월드에서 독립해 나온 개발자들에 의해 설립된 신생 기업이었는데, 블로그 연재시절부터 ‘메트로 2033’을 지켜본 일부가 강하게 게임화 의지를 품었던 것이다.

4A 게임즈 개발진이 제작에 참여한 ‘S.T.A.L.K.E.R.’ (사진출처: S.T.A.L.K.E.R. 공식 홈페이지)
▲ 4A 게임즈 개발진이 제작에 참여한 ‘S.T.A.L.K.E.R.’ (사진출처: S.T.A.L.K.E.R. 공식 홈페이지)

글루홉스키의 동의와 지원 하에 개발에 착수한 4A 게임즈의 ‘메트로 2033’은 THQ를 통해 2010년 발매됐다. 게임은 소설에 묘사된 모스크바 지하철의 공포스럽고 불가사의한 모습을 거의 그대로 시각화 했으며, 뛰어난 연출을 바탕으로 한층 생생하게 스토리를 전달해냈다. 덕분에 게임 ‘메트로 2033’은 높은 사양에도 불구하고 동유럽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메타크리틱 기준으로도 ‘메트로 2033’은 개량된 리덕스 버전 기준 90점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게임의 성공은 동구권 외부에서도 ‘메트로 유니버스’ 원작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덕분에 2012년에는 글루홉스키의 바람대로 소설 ‘메트로 2033’ 영문판이 북미에 정식 출간됐다. 게다가 같은 해인 2012년에 전통 있는 영화 제작업체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에서 ‘메트로 2033’ 영화화 라이선스를 사가기도 했다. 비록 영화화 프로젝트가 무산되긴 했지만, 이처럼 큰 영화 제작업체가 관심 가진 것만 해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공에 글루홉스키는 게임에 감사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그는 게임화는 원작 소설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행위라고 발언했던 ‘위쳐’ 원작자 안제이 사프콥스키의 의견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게임이 아니었으면 내 소설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게임에 공을 돌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그는 게임 제작진과 함께 작업해 게임 ‘메트로 2033’의 후속작인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 시나리오 작업을 맡기도 했다.

글루홉스키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 (사진출처: 스팀)
▲ 글루홉스키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 (사진출처: 스팀)

글루홉스키는 ‘메트로 유니버스’ 확장에 대핸 자신은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사건만 다루었지만, 누군가 시베리아나 유럽, 미국 등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도 써주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물론 게임을 통한 작품세계의 확장도 크게 기대한다는 뜻 또한 여러 인터뷰에서 자주 드러낸 바 있다.

이렇듯 ‘메트로 유니버스’는 게임 ‘메트로 2033’ 발매 이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원작자 작품 외에도 세계관을 공유하는 소설이 57개 이상 출간됐으며, 국내에도 글루홉스키의 ‘메트로 2033’, ‘메트로 2034’와 더불어 ‘메트로 유니버스’ 소설 4종이 한국어판으로 발매된 상태다.

지하철역이라는 제한된 공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인간사

‘메트로 2033’에 등장한 핵 전쟁으로 파괴된 모스크바 (사진출처: 스팀)
▲ ‘메트로 2033’에 등장한 핵 전쟁으로 파괴된 모스크바 (사진출처: 스팀)

흔히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광활한 황무지를 무대로 삼는 일이 많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거물인 ‘폴아웃’와 그 정신적 모태 ‘웨이스트랜드’는 물론, ‘레이지’, ‘호라이즌 제로 던’ 등 유수의 작품이 대부분 핵 전쟁으로 파괴된 넓고 황량한 세계를 조명했다. 그 점에서 ‘메트로 유니버스’는 자못 특이하다. 왜냐하면 위험으로 가득 찬 광활한 방사능 황무지 대신, 모스크바 지하철역이라는 제한된 공간만을 무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메트로 유니버스’는 2013년 전세계적인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처음 중동에서 국지적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곧 전세계 규모로 확산됐다. 핵 전쟁에 휩쓸린 것은 대국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발의 핵 미사일과 생화학 무기가 러시아 전 국토에 내리 꽂히며 거대한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러시아 수도인 모스크바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시민 대다수가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핵의 불길 속에 죽어간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옛 냉전시대에 이미 핵 전쟁을 대비해 지하철역을 방공호로 사용하는 비상 대피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4만 명의 시민이 지하철역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 핵 전쟁 여파로 혹독한 방사능 겨울이 닥치자 이 지하 생활도 장기화 됐으며, 각 지하철 역을 단위로 생존자 공동체가 생기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지하철에 새로운 사회가 성립된 셈이었다.

지하철역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존자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지하철역에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존자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메트로 유니버스’에서 각 역은 일종의 독립된 마을로 존재한다. 역마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공동 물자를 모아 배급제로 관리하며, 노동 할당제를 통해 함께 일한다. 외부에서 위험이 닥치면 힘을 모아 대응하기도 한다. 각 역은 저마다 특색을 지닌다. 예를 들어 박물관과 이어진 베데엔하 역은 그 영향으로 옛 시절 문명에 대한 강한 동경이 남아있으며, 아이들에게 체계적으로 문자와 지식을 가르치고 책을 수집하기도 한다.

일부 역들은 이해관계나 사상적 동질성에 따라 연합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메트로 유니버스’에서 가장 큰 연합 중 하나인 ‘링 라인 동맹(작중 한자 동맹으로 불리기도 함)’은 순환선 역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동시에 다른 노선으로 환승이 가능한 점을 이용해 상업적 연맹체로 발전했다. 지하철 노선 간 환승 시스템을 무역에 활용한 것이다. 덕분에 ‘링 라인 동맹’은 다른 어떤 파벌보다도 많은 자원을 비축해 두고 있다.

‘메트로 유니버스’에는 ‘링 라인 동맹’ 외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뭉친 ‘붉은 라인’, 우생학을 신봉하는 네오 나치들의 만든 ‘제4제국’, 가까이 위치한 국립 도서관 사서들과 국방부 군인들이 함께 피신해서 세우고 카스트 제도로 운영하는 ‘폴리스’ 등이 등장한다. 이는 실제로 러시아 내부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상이나 사회단체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메트로 유니버스’는 이러한 동맹들 사이의 대립과 음모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부족한 것 많은 세상에서도 서로 파벌을 나누어 전쟁을 벌이는 생존자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부족한 것 많은 세상에서도 서로 파벌을 나누어 전쟁을 벌이는 생존자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독특한 점은, 이러한 동맹들이 아주 미묘한 긴장관계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중 일부 동맹은 이미 서로 더 많은 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상자까지 낸 상황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은 모스크바 지하철이라는 좁은 공간 내에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도 없고, 부족한 물자 탓에 서로간의 거래도 필수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로를 혐오하고 차별하면서도 계속 부대끼며 살아간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의 분열된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듯하다. 같은 나라에 사는 국민이면서도 좌파와 우파가 나뉘어 서로를 헐뜯고,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증오하며, 계층에 따라서 대립하는 등의 상황이 핵 전쟁 후의 지하철 방공호에서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메트로 2033’은 여러 초자연적 상황이나 방사능 돌연변이 괴물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실제 사회의 잔인한 단면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분열된 사회상은 원작자 글루홉스키가 중시한 부분이다. 그는 지난 10일, ‘메트로 2033’ 영화화 취소 이유로 “워싱턴 D.C.를 무대로 한 영화 시나리오에는 공산주의도, 네오 나치도 없고, 제노포비아의 내러티브도 전해지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즉 제한된 공간에서 공존해야 할 사람들이 여러 사상적 이유로 분열해 서로를 증오하는 비극이 ‘메트로 유니버스’의 핵심이며, 바로 그 주제를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화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차별, 혐오, 박해… 괴물보다 무서운 인간의 어두운 민낯에 초점 맞추다

인류의 순수성을 지킨다며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제4제국’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인류의 순수성을 지킨다며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제4제국’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여느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마찬가지로 ‘메트로 유니버스’에도 인간에게 위험한 여러 요소가 등장한다. 그 중에는 식량과 도구의 부족과 같은 자원 부족의 문제도 있고, 방사능에 오염된 괴물이나 자연재해도 있다. 그러나 ‘메트로 유니버스’에서 인간 생존에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생존자 공동체들의 정치다. 인간의 증오야 말로 미친 돌연변이나 자연재해보다 위험하다는 의미를 담은 셈이다.

‘메트로 2033’은 세부적으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소설과 게임이 같은 줄거리를 공유한다. 이야기는 여러 역이 대립하거나 연합해 살아가고 있는 2033년의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주인공 ‘아르티옴’이 모든 생존자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공포스러운 돌연변이 ‘어두운 존재(Dark Ones)’의 존재를 파악하며 시작된다. ‘아르티옴’은 모스크바 지하철의 공동체들을 구하기 위해 여러 역을 지나 군사조직 ‘오더’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험난한 여정에 나선다.

그러나 이야기는 자못 의문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사실 진정한 위험은 ‘어두운 존재’가 아닌, 인간의 편견과 혐오였다. 전말은 이렇다. 사실 ‘어두운 존재’는 지상에서 살아남은 일부 인간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급속도의 변이를 겪으며 탄생한 돌연변이였다. 이들은 막강한 신체적 힘과 초능력을 얻은 대신 음성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구강 구조를 잃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지하에 살아남은 인간과 조우한 ‘어두운 존재’들은 공생을 위해 접근했던 것이다.

겉보기엔 괴물이지만, 실은 선량한 의도를 갖고 접근했던 ‘어두운 존재’ (사진출처: 포스트 런치)
▲ 겉보기엔 괴물이지만, 실은 선량한 의도를 갖고 접근했던 ‘어두운 존재’ (사진출처: 포스트 런치)

물론 문제는 있었다. 이들은 음성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기에 특유의 초능력으로 텔레파시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작용으로 접촉한 일부 인간을 미치게 만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어두운 존재’에 대한 괴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사람들은 이들을 괴물로 간주하고 보는 즉시 총을 쏴댔다. ‘어두운 존재’들은 얼마 간의 연습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붕괴시키지 않고도 정신 감응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어두운 존재’의 인간과 공존하고 싶다는 의도를 알지 못한 주인공 ‘아르티옴’과 인간 특수부대는 미사일을 확보, 위험을 무릅쓰고 지상까지 올라가 ‘어두운 존재’들의 서식처를 기어코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미사일을 유도하던 ‘아르티옴’은 마지막 순간에야 진실을 알았지만, 벌써 미사일은 ‘어두운 존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두운 존재’들은 뛰어난 힘과 초능력으로 인간을 보호하고 함께 살아갈 수도 있었지만, 편견과 혐오로 그 모든 가능성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렇듯 ‘메트로 유니버스’는 인간의 외부에 대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편견과 혐오가 얼마나 많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해버릴 수 있는지 보여줬다. 후속작인 ‘메트로 2033: 가스 라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일반인에게 존재가 감추어진 메트로-2의 군 시설이 드러나자 생존자들 사이에 무기를 독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을 다뤘다. 여기서 인간의 무의미한 동족상잔을 막아준 것이 주인공에게 동족을 잃은 ‘검은 존재’ 생존자들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생존자들 사이에 무기를 독차지하기 위한 전면전도 벌어진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생존자들 사이에 무기를 독차지하기 위한 전면전도 벌어진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게임도 글루홉스키가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정식 ‘메트로 유니버스’에 포함시킨 내용이지만, 소설 내용은 한층 암울하고 비극적이다. 소설 ‘메트로 2033’의 후속작인 ‘메트로 2034’는 아예 괴물과 관계된 내용을 대폭 줄이고 인간들 사이의 이야기만 다룬 작품으로, 여기서는 전염병에 감염된 한 역을 중심으로 한 사건이 전개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인 ‘헌터’는 끝에는 결국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폴리스’ 군인들과 함께 감염자를 소각해버린다.

물론 그 외에도 ‘메트로 유니버스’에는 여러 으스스한 괴담 같은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터널 속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을 깊은 어둠 속으로 홀리거나,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지하철역을 떠나지 못한 채 터널을 배회한다는 등 초자연적인 이야기들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을 단순한 괴담으로 치부할 것도 아닌 것이, 작중 불가사의한 일이 실제로 발생해 사람이 실종되거나 죽는 일이 빈번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이라는 공간 특유의 괴담을 적극 활용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자연적인 이야기는 곁가지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작중 생존자들의 반응이다. 한 역에서 괴사건이 발생하자 이웃 역이 자신도 피해를 입을까 겁먹고 터널을 폭파시켜 문제의 역을 고립시키거나, 혹독한 상황에서 모두 죽느니 소수를 차별하는 게 낫다며 박해를 정당화하는 등 도덕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괴물이나 자연재해 같은 ‘외부의 위험’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여기서 자신만 살겠다고 남을 버리는 인간의 편협성이라는 내러티브를 담은 것이다.

‘메트로 유니버스’, 어떤 작품들 있나?

어둡고 구불거리는 모스크바 지하철역을 무대로 한 ‘메트로 유니버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어둡고 구불거리는 모스크바 지하철역을 무대로 한 ‘메트로 유니버스’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이처럼 모스크바 지하철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무대 위에 인간들의 어두운 본성을 담아낸 ‘메트로 유니버스’는 어떠한 작품들이 있을까? 사실 이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은 외전 소설까지 취합할 시 60개가 넘어갈 정도로 작품세계가 방대하다. 다만 여기서는 게임 및 게임 시나리오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글루홉스키의 소설만 간단히 짚기로 한다.

지하철도의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린 ‘메트로 2033’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지하철도의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린 ‘메트로 2033’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첫 번째로 언급할 작품은 물론 ‘메트로 2033’이다. 이 작품은 2005년 처음 출간된 글루홉스키의 소설로, 게임도 대체로 해당 소설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구성을 갖추고 있다. 첫 작품인 만큼 젊은 주인공 ‘아르티옴’의 시선으로 핵 전쟁 후 생존자들이 처한 상황과 갈등 요소들을 기본적인 수준부터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 다만 게임은 FPS 장르 특성상 원작과 세부 내용에 약간 차이가 있다. 원작은 주인공이 힘 없는 보통 사람인 반면, 게임에서는 빠르게 뛰어난 전사로 성장한다.

어린 ‘어두운 존재’와 조우하며 시작되는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어린 ‘어두운 존재’와 조우하며 시작되는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작품 내 시간 순서상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은 게임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다. 이 작품은 ‘메트로 2033’이 끝난 후 ‘어두운 존재’들의 진실을 깨달아 자괴감에 빠진 ‘아르티옴’이,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어두운 존재’를 찾아내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었다. 이 작품 또한 글루홉스키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 모스크바 지하철 패권을 둘러싼 생존자들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서 주인공 ‘아르티옴’은 전작의 성과를 인정받아 아예 특수부대 ‘레인저’로 등장한다.

정식 한국어판이 출간된 ‘메트로 2034’ (사진출처: 제우미디어)
▲ 정식 한국어판이 출간된 ‘메트로 2034’ (사진출처: 제우미디어)

세계관 내에서 두 번째로 발생한 사건을 다룬 것은 게임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지만, 실제 발매된 순서로는 소설 ‘메트로 2034’가 두 번째다. ‘메트로 2034’는 주인공으로 ‘아르티옴’이 아닌 인물들이 등장, 전작과 다른 시점에서 ‘메트로 유니버스’를 보여준 점이 특징이다.

사실 이 작품은 게임으로 제작될 계획이 있었지만, FPS에는 맞지 않는 로맨스와 비극에 치중한 플롯 탓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를 대신해 완전히 새로 쓴 시나리오로 제작된 게임이 바로 앞서 언급한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다.

영문판 ‘메트로 2035’ 표지 (사진출처: 아마존)
▲ 영문판 ‘메트로 2035’ 표지 (사진출처: 아마존)

‘메트로 2035’는 글루홉스키의 최신 소설이다. 이 소설이 발매되기 전까지만 해도 팬들 사이에는 게임과 소설이 서로 다른 세계관이라는 오해가 있었다.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와 ‘메트로 2034’가 다른 시점에서 전개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메트로 2035’ 발매로 글루홉스키가 게임과 소설 모두 이어지는 설정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며 논란은 일단락됐다.

‘메트로 2035’는 ‘메트로 2033: 라스트 라이트’와 ‘메트로 2034’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다. 앞선 두 작품의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며, 실은 모스크바 지하철의 모든 생존자 공동체를 배후조종하는 큰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주인공 ‘아르티옴’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 사건을 폭로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종국에는 위험한 지상으로 추방에 가깝게 도피하기에 이른다.

2019년 출시되는 ‘메트로: 엑소더스’에서는 드디어 모스크바 밖으로 나가게 된다 (사진출처: 스팀)
▲ 2019년 출시되는 ‘메트로: 엑소더스’에서는 드디어 모스크바 밖으로 나가게 된다 (사진출처: 스팀)

2019년 2월에 발매될 게임 ‘메트로: 엑소더스’는 이러한 ‘메트로 2035’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아르티옴’은 자신과 함께 지상으로 나온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열차를 타고 정착할 새 땅을 찾아 나선다. 아직 많은 정보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정황상 지상은 핵 겨울이 끝나고 서서히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생존자들을 지하철역에 가둔 채 통제하고 싶어하는 적들은 외부 세상의 진실을 감추고자 해, 또 한 번 갈등이 예상된다.

공개된 정보들에 따르면 ‘메트로: 엑소더스’는 게임과 소설 공통으로 주인공 ‘아르티옴’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아르티옴’의 이야기에 한정된다. 글루홉스키는 ‘메트로: 엑소더스’ 이후로도 ‘메트로 유니버스’가 계속 확장될 것이며, 보다 다양한 매체로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코레일 2035’ 나올 수 있을까? 확장 욕심 큰 ‘메트로 유니버스’

밀라노를 무대로 한 ‘메트로 유니버스’ 소설 ‘칠드런즈 크루세이드’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 밀라노를 무대로 한 ‘메트로 유니버스’ 소설 ‘칠드런즈 크루세이드’ (사진출처: 메트로 위키)

이렇듯 ‘메트로 유니버스’는 소설의 단순 게임 번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작가가 집필하는 소설과 게임을 오가며 통합 세계관을 확장 중이다. 특히 원작자 글루홉스키는 처음부터 세계관 확장에 큰 욕심을 보였다. 자신은 모스크바 지하철만 무대로 다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시베리아 같은 러시아 내 다른 지역이나, 유럽과 미국 등 다른 나라를 무대로 한 작품도 나왔으면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글루홉스키는 ‘메트로 유니버스’ 프랜차이즈를 왕성하게 퍼뜨리고 있다.

현재 ‘메트로 유니버스’는 이미 러시아 너머로 뻗어나간 상태다. 러시아가 아닌 나라 작가들이 자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상당수 집필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 몰도바 등 동구권이지만, 영국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로마와 밀라노, 그리고 북해 해상 생존자를 다룬 작품도 나온 상태다. 특히 해상 생존자들을 다룬 소설에서는 한국인 생존자들의 이야기도 일부 나와 국내 팬들의 관심을 끈 바 있다.

이러한 작품들도 본질적으로는 글루홉스키가 고수하는 ‘메트로 유니버스’의 주제의식, 즉 핵 전쟁 이후 고립된 좁은 공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암울한 사회상을 다루는 데 집중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처럼 차별, 혐오, 박해 등에서 비롯된 사회 분열을 주요 내러티브로 삼았으며, 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음은 최근 영화화 무산 사건으로도 분명히 드러난 바 있다. 무대를 달라도 분위기와 주제의식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독특한 주제의식에 집중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 ‘메트로 유니버스’, 과연 게임으로는 얼마나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을까? 게임 중 최초로 모스크바를 벗어나는 ‘메트로 유니버스’ 작품 ‘메트로: 엑소더스’는 오는 2019년 2월 발매된다.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 보다 다양한 세계를 게임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보자. 언젠가는 한국을 무대로 한 ‘코레일 2035’가 나올지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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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엑소더스 2019년 2월 15일
플랫폼
장르
제작사
4A게임즈
게임소개
‘메트로: 엑소더스’는 핵전쟁 이후 지하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그린 ‘메트로’ 시리즈의 3번째 작품으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번 작품에서 플레이어는...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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