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특집기사를 통해 일본의 전국시대가 어떤 것이며 전국시대가 시작된 원인인 오닌의 난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국시대에 일어났던 주요 전투의 원인과 진행과정, 의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게임에서 흔히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유명전투가 어떤 내용인지 몰라 그동안 답답해했던 게이머들은 꼭 체크하자. 「전국무쌍」에서도 전국시대의 유명한 전투를 에피소드로 만들어 게임 중에 등장시키니 게임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오케하자마 전투 -1560년
세력: 오다 노부나가 VS 이마카와 요시모토
요약: 쿄토 상경을 위해 진군하던 이카마와 요시모토 군과 그 상경로 도중에 있어 전투를 피할 수 없었던 오다 노부나가 군과의 결전. 아직 본거지를 확실하게 정비하지 못한 노부나가는 숫적 열세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만 특유의 과단성과 판단력을 발휘해 이마카와 군을 급습, 요시모토를 죽이는데 성공한다.
진행: 전국시대의 야심가 이마카와 요시모토는 스루가, 미카와, 토우토우미를 장악해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닌의 난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곳곳에서 다이묘들간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요시모토는 막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상경을 통해 막부의 권위를 되찾고 자신이 그 후원자로서 전국의 다이묘들 윗자리에 서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인접한 타케다 신겐, 호죠 우지야스와 혼인을 통한 동맹을 맺어 뒤를 든든히 한 요시모토는 1560년 5월, 드디어 본거지 순푸를 출발해 쿄토 상경을 시작한다. 25,000의 대병력을 자랑하던 이마카와 군은 하마마츠, 요시다를 거쳐 노부나가가 다스리고 있던 쿠츠카케에 도착해 노부나가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요시모토의 야망을 노부나가 또한 알고 있었지만, 얼마전 벌어진 동생 노부유키와의 가독 싸움으로 인해 가신들이 두 파로 나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던 차라 병력을 준비해놓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야 어떻게 해서 전투를 피해 요시모토를 통과시킬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요시모토가 상경하면 쇼군의 이름을 빌어 요시모토의 영지와 가장 인접한 자신을 가장 먼저 제거할 것임을 알기에 이마저 여의치 않았던 노부나가. 가신들은 농성전을 주장하지만 이미 사기가 떨어진 군대로 농성전을 해봤자 별 차이가 없고, 외부세력에 의한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노부나가는 결사의 항전을 다진다.
한편 이마카와 군은 각지로 군을 보내 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마루네를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아사히나 야스요시가 와시즈를 점령하는 등 연승을 거두고 있던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에 도착하자 전군에 휴식 명령을 내렸다.
각지에 파견한 첩자를 통해 비록 여러 지역을 빼앗겼으나 이마카와 요시모토의 병력이 여럿으로 나뉘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노부나가는 요시모토의 숙영지가 과거 자신이 지겹게도 모의훈련을 했던 오케하자마였음을 알고 더욱 자신을 얻는다. 요시모토 기습을 위해 3,000명의 결사대를 준비한 노부나가는 마침내 출전한다.
나카지마 방면으로 진군하던 노부나가는 요시모토의 본진이 오케하자마 중간에 위치한 텐카쿠 골짜기에 있음을 듣고 1,000명을 나카지마 부근에 배치해 요시모토 군의 원군을 차단함과 동시에 적의 주의를 끌고 2,000명의 병사와 함께 요시모토 본진으로 숨죽여 전진한다. 노부나가가 텐타쿠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재빨리 첩자를 풀어 요시모토 군의 기강이 해이해져있음을 파악한 노부나가는 비가 그치자 바로 총공격을 시도한다.
거듭된 승리로 인해 방심하고 있었던 요시모토 군. 게다가 심한 소나기 때문에 무장까지 벗어놓았던 요시모토 군은 뜻하지 않은 기습공격을 받고 지리멸렬 무너져갔다. 이윽고 요시모토의 본진 위치가 알려지고 노부나가는 전군에 돌격명령을 내린다. 이마카와 요시모토는 숫적 우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미처 야망을 불태워보지도 못하고 무명소졸 핫토리 고헤이타의 칼에 의해 수급이 잘리고 만다(전국시대의 유명 무장은 설령 자신이 패해 죽게 되어도 이름있는 무장의 손에 의해 죽길 원했다. 일반 병졸에 의해 죽는 건 치욕이라 생각했다).
의의: 쇼군의 정치적, 군사적 이용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다른 유력 다이묘들과 달리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지닌 이마카와 요시모토는 유력 다이묘들 중 가장 먼저 상경을 꾀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난다. 이로 인해 미가와, 오카자키 등을 병합해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마카와 가문은 우둔한 후계자로 인해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순푸에 인질로 잡혀있던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이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카와 가문의 혼란을 틈타 독립, 어렸을 적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노부나가와 평생 동맹을 맺어 점차 실력자로 성장해간다.
이마카와 가문의 몰락은 타케다, 호죠, 이마카와 세 가문의 철벽같은 동맹관계에 균열을 초래했다. 타케다 가문은 이마카와 가문의 영토를 침략해 팽창정책을 실시하고 오다, 우에스기 가문과 마찰을 빚었으며 호죠 가문 역시 타케다 가문의 압력에 의해 세력이 축소된다.
한편 노부나가는 이마카와 요시모토를 격파, 전국에 그 무명을 떨쳐 급속도로 세력을 성장시킨다. 또한 이에야스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어 동쪽은 이에야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쪽으로 전력을 다해 진격, 이후 천하인으로 성장해나간다.
오다 군이 승리했던 원인으로 후세 사람들은 우선 노부나가의 판단력을 꼽는다. 요시모토의 총병력 25,000명 중 본진을 지키고 있던 건 겨우 5,000명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노부나가는 원군이 없는 농성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결사대를 조직, 기습에 승부를 걸었다. 또한 첩자를 이용해 요시모토 군의 동태를 철저히 파악, 정보전에서도 승리했다. 요시모토 군의 첩자들은 노부나가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많은 병력으로도 패하고 만 것이다.
▲ 노부나가의 급습을 받아 이마카와 요시모토는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다 |
▲ 오케하자마 전투에 앞서 이마카와 요시모토의 진군로를 나타내는 그림 |
카와나카지마
전투 - 1561년
세력: 타케다 신겐 VS 우에스기 켄신
요약: 카와나카지마는 시나노 지방의 핵심 전략지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타케다 군과 우에스기 군은 총 5번에 걸쳐 큰 싸움을 벌였다. 그 중 가장 격렬했던 것이 1561년 벌어진 4번째 싸움이며 카와나카지마 전투라면 보통 이것을 지칭한다. 시나노 지역의 요충지인 카와나카지마를 차지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건 타케다 신겐과 이를 막기 위해 출진한 우에스기 켄신의 군세가 카와나카지마에서 맞붙은 이번 전투에서 신겐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만 우에스기 켄신의 맹공을 받아 유능한 장수와 많은 병력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진행: 이마카와 요시모토의 죽음으로 힘의 공백이 생긴 순푸 지역을 손에 넣은 타케다 신겐은 우에스기 켄신이 다스리던 시나노를 침공한다. 에치고의 다이묘 우에스기 켄신은 신겐에게 시나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나 신겐은 이를 묵살, 에치고의 용이라 불리는 우에스기 켄신과 가이의 호랑이라 불리는 타케다 신겐 양세력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한다.
결전 장소는 카와나카지마. 양세력의 본거지로부터의 거리를 고려하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세 번에 걸친 켄신의 선제공격을 신겐은 의도적으로 회피, 국지전에 그쳤으나 켄신은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자 굳게 결심하고 18,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자신의 거성 카스가 산성을 출발해 카와나카지마에 도착했다. 신겐 역시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 2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카와나카지마로 향했다.
초반 전황은 신겐에게 유리했다. 시나노를 병합한 후 카와나카지마에 가이즈 성을 세운 신겐은 성내에 3,000명의 병력을 이미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카와나카지마 깊숙이 들어온 켄신 군을 양쪽에서 협공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이 점은 켄신 쪽에서도 알고 있었다. 가신들은 이를 이유로 전장을 바꾸자고 진언했지만 켄신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군을 그 자리에 고정시켰다. 가이즈 성에서 병력이 나오면 퇴각로가 끊길 거라는 생각에 켄신의 병사들이 동요하자 켄신은 신겐이 카스가 산성을 공격하러 온다면 우리는 후퇴하지 않고 신겐의 본거지인 고슈 성을 향해 진군할 것이라고 말해 사태를 수습하는 등 군략가로서 뛰어난 면을 발휘했다.
한편 켄신이 이렇게 나오자 오히려 곤란해진 것은 신겐이었다. 켄신이 총병력 18,000명 중 5,000을 따로 배치, 13,000의 군세만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5,000명의 군사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고심하던 신겐은 겨울철이 되어 눈이 내리게 되면 초조해진 켄신이 뭔가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 판단하고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켄신의 영지인 에치고 지역은 산맥으로 가로막힌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일찍부터 눈이 내렸으며 눈이 내리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폭설로 인해 군사행동을 벌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켄신은 겨울이 다가와도 여전히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신겐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사 간스케의 진언을 받아들여 12,000의 병사로 켄신의 본진을 공격, 켄신을 후퇴시키고 자신은 8,000의 군사로 켄신의 퇴각로를 막아 결정타를 입히기로 한다.
신겐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켄신 역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겐 진영에 침투시킨 첩자가 유난히 많이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를 켄신에게 보고하자 이는 결전전야의 징조라고 판단한 켄신은 미리 파악해두었던 신겐 측의 첩자를 모두 제거해 자신의 움직임이 신겐 측에 노출되지 않게 한 후 지휘하고 있던 13,000의 병사들을 모두 동원해 신겐을 공격한다. 2만의 병사들을 나누어 켄신을 공격하려 했던 신겐은 켄신의 계략에 말려 본진을 지키고 있던 8,000명의 군사로 13,000에 달하는 켄신의 군세를 맞이하게 됐다. 켄신은 곧 돌아올 신겐의 별동대 12,000명을 상대하기 위해 후방에 병사를 따로 배치하는 등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켄신의 급습을 받은 신겐은 진형을 공격진형인 어린진에서 수비진형인 학익진으로 바꾸고 수비태세를 갖추었으나 병력의 열세와 뜻하지 않은 기습, 맹장 켄신의 지휘를 받은 켄신 군에 의해 파죽지세로 무너졌다. 이 싸움에서 신겐의 동생이자 뛰어난 무장이었던 타케다 노부시게를 비롯해 신겐의 군사 간스케 등 많은 중신들이 목숨을 잃는다. 켄신이 이끄는 본진이 신겐의 본진을 막 급습하려는 순간 별동대로 출발했던 신겐의 군사 12,000명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켄신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음을 아쉬워하며 퇴각했다(여담이지만 이때 켄신이 신겐의 막사로 돌격해 신겐과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는 설도 있다. 이때 신겐은 거듭되는 켄신의 맹공을 부채로 막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겐을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하는 부채는 이 이야기 때문).
의의: 시나노의 거점인 카와나카지마를 확보했다는 군사상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동생 노부시게를 비롯해 군사 간스케 등 많은 인재를 잃었기에 신겐군의 피해는 켄신보다 더 컸다. 한편 켄신 역시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략목표인 시나노 탈환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후 신겐이 사망할 때까지 타케다 군에 전략적인 위협을 받았다.
일본 사람들은 전국시대의 수많은 전투 중에서 유난히 카와나카지마 전투를 가장 격렬했던 전투로 꼽는다. 군신이라 불릴 정도로 무용을 자랑했던 우에스기 켄신과 전국시대 최고의 군략가로 꼽히는 타케다 신겐 두 영웅이 대결했다는 점도 그 이유 중 하나겠지만 두 영웅의 성품과 아울러 음험한 모략과 귀계가 난무했던 전국시대에서 극한의 전략과 자신의 무용만을 발휘해 정정당당하게 싸웠다는 점이 유달리 빛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았던 타케다 신겐. 못이기는 싸움을 이겨버렸던 켄신. 두 영웅의 드라마틱한 전투는 이에 더욱 찬연하다.
▲ 태합입지전 4에서 묘사한 우에스기 켄신의 모습. 멋진 미중년의 모습이다 |
▲ 태합입지전의 타케다 신겐. 켄신에 비해 통솔이 1 부족하지만 전국최고의 군략가답게 내정과 외교능력이 뛰어나다 |
아네가와
전투 - 1570년
세력: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VS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
요약: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과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아네가와 평야 일대를 무대로 격돌한 전투. 아사이 군의 맹공 앞에 오다 군은 위기에 처하지만 도쿠가와 군이 아사쿠라 군을 격파하고 본진에 합류함에 따라 전세가 역전되어 결과적으로 큰 승리를 거둔다.
▲ 가네가와를 사이에 두고 아사쿠라와 도쿠가와, 아사이와 오다 군이 대치하고 있는 형국 |
▲ 전투가 진행되면서 도쿠가와 군이 아사쿠라 군을 먼저 격파, 여유 병력으로 아사이 군의 옆구리를 친다 |
진행: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상경 요청을 무시한 아사쿠라 가문을 치기 위해 3만의 대군을 이끌고 1570년 4월 20일, 쿄토를 떠나 에치젠으로 출발했다. 북오미 지역을 거쳐 직접 에치젠으로 가는 길은 아사쿠라 군이 이미 경계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노부나가는 와카자 방면을 통해 에치젠으로 향했다. 불과 1주일만에 아사쿠라 가문의 본성인 이치죠타니 앞까지 진군한 노부나가의 용병술은 상대가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진군한다는 병법상의 기본 이치와 재빠른 진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치죠타니 앞에 도착한 다음 날 노부나가의 매제이자 동맹관계에 있었던 아사이 나가마사가 동맹관계를 끊고 노부나가 군에 선전포고를 했다. 아사이 나가마사는 절세미인이었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남편으로 노부나가가 자신의 상경에 큰 도움을 줄 거라는 생각에 다른 유력 다이묘를 마다하고 여동생을 준 인물.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던 노부나가가 이 소식을 듣고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얼마나 당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아사이 나가마사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아버지 아사이 히사마사가 나가마사에서 가독을 물려준 후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긴 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히사마사를 비롯한 가문의 가로들이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이 가문과 오랜 동맹관계인 아사쿠라 가문이 노부나가에 의해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히사마사와 가로들은 나가마사를 설득, 노부나가와 동맹을 끊은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던 나가마사는 아사쿠라 가문을 택하는 것보다 오다 가문을 택하는 것이 자신의 가문에 유리하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해 결국 노부나가와 등을 몰리고 만다. 또한 아사이 가문과 아사쿠라 가문이 오랜 동맹관계였음을 알고 있던 노부나가는 나가마사와 동맹을 맺을 때 만약 자신이 아사쿠라 군을 공격하게 된다면 미리 아사이 가문에 양해를 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번 출병에 대해 노부나가는 이렇다 할 언질조차 나가마사에게 주지 않아 나가마사로서는 아버지의 청을 더욱 거절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가마사가 배신했다는 소식을 접한 노부나가는 신속히 움직였다. 이치죠타니 성을 눈앞에 두고 미련없이 병사들을 수습해 쿄토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오미에서 잇키가 발생하고 록가쿠 가문이 움직이는 등 사태는 계속 심각해졌다. 노부나가는 요충지에 핵심무장을 배치해 쿄토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그 날로 기후를 향해 출발했다. 기후는 많은 병력들과 핵심무장들이 지키고 있는 노부나가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기후에 도착한 노부나가는 병사를 다시 추스르고 반격에 나섰다. 21일, 오미 평정에 나선 노부나가는 6월 4일 록가쿠 가문을 토벌해 남 오미를 평정하고 일단 기후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출진해 21일에는 25,000의 군세를 이끌고 아사이 나가마사의 본성인 오다니 성에 도착한다.
오다니 성을 앞에 두고 노부나가는 착잡했다. 자신을 믿고 따라줄 것이라 생각해 그토록 아끼던 동생을 주었건만 결과는 배신으로 돌아왔으며, 이를 토벌하기 위해 군을 출진시켰지만 난공불락으로 이름 높은 오다니 성을 함락시키기에는 병력이 부족했다(당시 오다 군은 25,000명이었고 아사이 군은 8,000명이었지만 공성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10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기에 병력이 부족했다). 시간이 지나 노부나가의 영원한 맹우 이에야스의 원군 6,000명이 도착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3만을 넘었고, 아사쿠라의 원군 10,000명이 아사이 쪽에도 더해져 병력은 총 18,000을 헤아렸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오다니 성의 지성인 요코야마 성을 포위했다. 적을 끌어내어 공성전이 아닌 야전으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에서도 야전보다는 공성전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신중론이 나왔지만 요코야마 성이 오미에서 에치젠에 이르는 요충지라 이곳을 빼앗기면 아사쿠라 군의 본거지인 이치죠타니 성까지 뚫릴 수 있어 결국 새벽을 틈타 부대를 보내 성을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금방 노부나가에게 발각되어 양군은 6월 28일 새벽, 아네가와의 남쪽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전투의 초반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불리했다. 오다 군을 상대하고 있던 아사이 군의 선봉 이소노 카즈마사의 공격 앞에 노부나가의 진이 차례차례 격파되었던 것이다. 야전에서는 아무리 방어진이 잘 짜여있더라도 일각만 무너뜨리면 모든 연계가 무너져 계속해서 붕괴되는 경향이 강했다. 총 13진까지 준비되어 있던 노부나가 군은 11진까지 뚫리고 있었다.
한편 아사쿠라 군과 대치하고 있던 도쿠가와 군은 도쿠가와 군의 우세로 진행됐다. 총대장 아사쿠라 요시카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하는 아사쿠라 군을 놓치지 않고 이에야스는 총공격을 감행, 아사쿠라 군을 격파해버린다. 이에야스는 이 기세를 몰아 아사이 군을 협공했고, 위기에 처했던 노부나가는 이에 호응해 아사이 군을 반으로 갈라 각개격파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은 오다니 성으로 쫓겨들어가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병사들을 추슬러 본거지로 귀환한다.
의의: 노부나가가 승리한 가장 큰 원인은 공성전이 불리함을 안 노부나가는 상대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요코야마 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꾸며 유인, 자신에게 유리한 야전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비록 아사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인해 위험한 지경에 처하긴 했지만 아네가와 전투를 통해 노부나가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1573년부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 아사이, 아사쿠라, 미요시를 차례로 무너뜨려 천하포무를 위한 기초를 다진 노부나가는 이후 나가시노 전투에서도 그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 아사이 나가마사. 실제로는 이렇게 생기기 않았겠지만 상당히 귀공자 타입이다 |
▲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능력치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러니 노부나가에게 당했지… |
나가시노
전투 - 1575년
세력: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VS 타케다 카츠요리
요약: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두려워했던 전국 제일의 군략가 타케다 신겐이 죽고 그 아들 카츠요리가 가독을 상속하자 노부나가는 후환을 끊기 위해 군세를 이끌고 타케다 가문 정벌에 나선다. 이윽고 미카와 북쪽의 나가시노 지역에서 격돌한 양군. 최강의 기병대를 자랑하는 타케다 가문이었지만 노부나가의 새로운 전술에 말려 변변히 힘도 써보지 못한 채 수많은 병사들과 장수들을 잃는 등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 나가시노 성을 포위한 타케다 군의 포진 |
▲ 도쿠가와 군이 접근하자 카츠요리는 나가시노 성의 포위를 풀고 결전에 임한다. 다케다 군의 포진 모습 |
진행: 타케다 신겐이 1573년 4월 12일 사망한다. 1572년 미카다카하라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게 참패의 굴욕을 맛보게 한 타케다 신겐의 죽음은 노부나가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해 노부나가는 한숨을 돌렸지만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밀지를 받은 이시야마혼칸지, 록가쿠, 나가시노, 모리, 마츠나가를 비롯한 각지의 유력 다이묘들은 여전히 노부나가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타케다 신겐이 상경이라도 한다면? 이런 걱정 속에 항상 신겐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던 노부나가는 신겐이 상경 도중 병사(혹은 피살이라는 설도 있음)했다는 소식을 듣고 재빨리 움직인다.
1573년 7월, 자신이 옹립했지만 자신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방하고 8월 18일에는 아사쿠라, 27일에는 아사이 가문을 멸망시키는 등 노부나가는 자신을 조여왔던 세력들의 각개격파에 나선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정작 가장 두려워했던 타케다 가문의 동향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겐의 뒤를 이어 가독을 상속한 타케다 카츠요리가 1574년 1월 아케치 성을 포위하고 6월에 토도우미 최고 요충지인 타카텐진성을 함락하기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반 노부나가 포위망을 격파해 방심하고 있는 사이 카츠요리에게 허를 찔린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사실 노부나가가 카츠요리를 유인하기 위해 던진 미끼였다. 아사이, 아사쿠라를 정벌함으로써 카츠요리를 긴장시킨 후, 기다리다 못한 카츠요리가 본거지에서 나와 공격해오면 다시 뒤로 물러나 더욱 깊숙이 끌어들이는 책략. 이는 미카다카하라에서 타케다 군단 기마대의 강력함을 뼈저릴 정도로 맛본 노부나가가 카츠요리를 자만에 빠뜨리기 위해 사용한 고도의 심리전술이었다. 신겐이 죽었다고는 하나 신겐 휘하에 있던 명장들이 건재하고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던 기마대가 있었기에 타케다 가문은 아직 두려운 상대였다.
한편 노부나가는 새로운 전법으로 철포대(우리나라에는 조총으로 알려짐)의 활용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철포란 유럽에서 전래된 화승총을 일컫는 말로 노부나가는 어렸을 때부터 철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한 앞으로의 전투에서는 철포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 철포기술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 당시 일본의 가장 큰 무역거점이었던 사카이의 상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점과 오미 지역에 철포 생산지를 구축한 점이 바로 그 선견지명의 결과였다. 다른 다이묘들도 철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노부나가만큼은 아니었으며 설혹 관심이 있었다해도 철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아 철포의 보유량에서 노부나가와 큰 차이를 보였다. 당시 타케다 군단의 철포가 가신들이 부담했던 것에 비해 노부나가는 사비를 이용해 직접 구입, 최하급 병졸인 아시가루에게 지급했다는 것만 봐도 그 보급현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윽고 1575년 4월, 카츠요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겐이 사망했던 타카텐진 성을 함락시켜 자신감을 얻은 카츠요리가 이에야스의 영지 미카와의 나가시노 성을 공격한 것이다. 신겐이 자신이 죽은 후 3년간은 절대 군을 움직이지 않고 방어에 전념하라 했던 유언과 나이토 아키토요, 코사카 마사스미 등 노신들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워낙 뛰어났던 아버지 때문에 종종 비교당하며 마음에 상처를 입어온 카츠요리는 이번 기회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쨌거나 4월 11일을 기해 카츠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고 5월 6일에는 요시다 성을 공격한다. 노부나가 또한 맹우 이에야스를 돕고 타케다 가문과 결전을 치루기 위해 츠츠이 준케이와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서 철포를 징발해 출진, 고쿠라쿠지 산에 본진을 세운다. 가츠요리는 오다-도쿠가와 군이 접근하자 일단 나가시노 성의 포위를 풀고 본진을 옮겼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3만, 타케다 군은 15,000. 하지만 최강의 기마대를 보유한 타케다 군에게 이 정도의 병력차이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카츠요리는 기마대의 돌격공격을 살리기 위해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마주본 고지대로 부대를 이동시킨다. 당시 나이토 아키토요, 야마가타 아키카게, 바바 노부하루 등 신겐을 섬겨온 노장들이 결전의 위험성을 간언했지만 이미 승리에 눈이 먼 카츠요리는 이를 묵살, 결전명령을 내렸다.
5월 21일 오전, 카츠요리는 노부나가군을 유린할 생각으로 최강의 기마부대를 앞세워 돌진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이미 노부나가에게는 기마대를 대처할 완벽한 방법이 마련되어있음을…. 노부나가는 카츠요리가 기마대를 선봉에 세울 것이라 생각하고 본진 주위에 3중의 마방책을 설치했다. 본래 책(柵)이란 말이나 수레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세우는 장애물로 노부나가가 세운 마방책은 기마대를 방어하기 위해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방어병기였다. 또한 노부나가는 그동안 준비한 철포를 모두 동원해 총 3천정의 철포를 5개대로 나누어 각각 요소에 배치했다. 뿐만 아니라 철포의 약점인 재장전(한 번 발사한 후에는 총신 내부를 청소한 후 화약을 다시 장전하고 심지에 불을 붙이는 등 장전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간격을 줄이기 위해 철포대를 3열로 나누어 앞열이 먼저 사격한 후 재장전을 하는 동안 중간열이 사격, 이후 후열이 시간을 두어 사격하는 ‘철포삼단’의 전법을 채용해 철포공격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끔 했다.
다섯 곳에서 1,000정의 철포가 끊이지 않고 계속 사격하는 그 위력을 막강했다. 기세좋게 돌진한 타케다 군의 기마대는 마방책에 놀라 말들이 주저하는 사이 노부나가의 철포대의 집중공격을 받아 하나하나 괴멸되어갔다. 선봉 야마가타 아키카게를 비롯해 타케다 노부스미, 오바타 노부사다, 바바 노부하루 등 타케다 군의 수많은 명장들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노부나가의 아시가루에 의해 죽어갔다.
믿고 있던 기마대가 괴멸된 후 타케다 군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공격 앞에 아무 저항을 하지 못하고 붕괴되어갔다. 전투시작 후 고작 8시간. 이름높은 타케다 군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전투를 통해 노부나가는 한층 더 이름을 떨쳤으며 타케다 가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의의: 적을 방심시켜 본거지에서 끌어내는 전략적인 성공과 마방책과 철포를 이용해 기마대를 상대한 전술적인 성공이 어우러진 나가시노 전투. 장애물이 있으면 놀란 말이 정지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노부나가는 마방책을 이용해 기마대의 돌파력을 무력화시킨 후 철포를 이용해 쓰러뜨렸다.
▲ 나가시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타케다 군은 이후 계속 영토가 축소되다 1582년, 카츠요리의 자결과 함께 소멸되고 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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