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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라리 게임광에서 지사장까지 ‘게임왕 박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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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게임업계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주역이 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죠. 이런 분들 중에는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게임메카는 [1%]라는 연재코너를 통해 결코 평범하지 않거나 특별한, 혹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분들을 찾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연재의 주인공은 에픽게임즈코리아의 '박성철' 지사장입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볼 법한 어떤 이의 매우 특별한 인생은 다양한 ‘경험’에서 태동한다. 보고 듣고 겪고 느낀 귀중한 경험들은 편린처럼 흩어져 있다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 거짓말처럼 나타나 강렬한 빛을 뿜는다. 누구나 꿈꾸는 인생의 조각모음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에픽게임즈코리아의 박성철 지사장은 올해로 36세다. 유명한 외국계 게임 회사의 지사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젊은 축에 속한다. 한껏 멋을 낸 외모는 근사해 보여 척 봐도 외국물 좀 먹고 온 것 같은 아우라를 풍긴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잘 먹고 잘 자라 젊은 나이에 성공한 것이 틀림없다. 분명 그렇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학창시절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돌아다녔으며, 대학가를 주름잡던 댄서에, 교수에게 욕설을 하고, 대학졸업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린 이른바 ‘골통’으로 생각하긴 힘들다. 놀라지 마라. 모두가 사실이다.

▲ 에픽게임즈코리아의 박성철 지사장


어린 시절, ‘비가 오면 학교 가기 싫어’

남들은 그를 ‘괴상한 놈’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물론 그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런 것들을 즐겨온 것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그는 학교를 빼 먹는 날이 많았다. 특히 비가 오면 더 그랬다. 그렇다할 이유도 없다. 그냥 ‘머리가 꼬불거리는 게 싫어서’라는 게 이유라면 이유다. 등교하다가도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금세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제 멋 대로였다. 언뜻 보면 ‘내놓은 자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해했다.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연락이 오자 “개근상 받는 아들로 키우고 싶지 않다.”고 전했단다. 웃기기보단 차라리 놀랍다.

학교에 안 가는 날이면 그는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하루 종일 앉아 지루하게 공부하는 것보다 한 두 시간 집중해서 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초등학생 시절의 그는 늘 성적이 좋았다. 마음먹고 공부하니 1등까지 했다. 의기양양해 어머니에게 자랑하니 1등을 하면 네가 좋은 거지, 내가 좋은 게 아니라며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과 그것을 해내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몸에 밴 자신감과 자유분방함은 바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 어린 시절의 박성철 지사장

고교를 진학하고도 학교를 빼먹는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성적은 좋았다. 반장까지 했다. 그러다 소위 말해 ‘문제아’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인생은 한 번 곤두박질친다. 그는 자유롭게 노는 친구들이 좋았고, 그들과 항상 어울려 다녔다. 술, 담배는 물론 동급생들을 괴롭히고 옷을 뺏는 등 온갖 못된 짓도 서슴없이 하곤 했다. 결국 고교 3년이 될 무렵에는 지방대에 겨우 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공부 잘하는 문제아’ 박사장은 이렇게 고교 시절을 마감한 채 93년 명지대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세상에 좋지 않은 경험이란 없다’

명지대에 입학한 그는 여전히 노는 걸 즐겼다. 당시 유행하던 락카페와 나이트를 오가며 젊음을 만끽했다. 특히 춤에 매력을 느끼고 스스로 댄스 동아리를 만들어 동기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무료함을 느낀 그는 수능 시험을 다시 한번 보기로 마음먹는다. 돈까지 써가며 공부하긴 싫어 당시 다니던 학원에서 동료의 책을 훔쳤다. 그가 얼마나 막 살았는지 절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 몸에 밴 습관 덕분인지 한다면 하는 그다. 수능 시험을 치르고 이듬해 집에서 가까운 국민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국민대에서도 적응하지 못했다. 자동차 디자인을 하고 싶어 기계자동차 공학부를 선택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하고 싶은 분야와는 영 거리가 멀었다. 결국 또 놀았다. 선배들은 공대 졸업하면 취업률이 80~90%를 육박하는데 왜 저러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비아냥거렸다. 1년 반 만에 그는 학교에서 나왔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퇴학당했다.

▲ 박성철 지사장의 몇 년 전의 모습(매시브 APEC 직원들과 함께)

학교를 나온 그는 이번엔 호주로 유학을 떠난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는 좋아했기 때문에 이 분야를 살려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유학 시절에도 결코 평범하게 지내지 않았다. 당시 유학생들이 다니던 랭기지 스쿨은 ‘영어 가장 못 하는 애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스스로 생각하고 도심가를 돌며 집들을 무작정 방문했다. 실제로 ‘미친놈’이란 소리까지 들었지만 결국 마음 맞는 호주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곳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접했다. 혹여나 한국 사람을 만나더라도 절대 한국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유학을 온 목적이 분명했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한번 할 땐 정말 제대로 하는 스타일임이 분명하다. 호주에서 대학 진학을 생각했지만, IMF가 터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출중하게 쌓인 영어 실력과 함께.

유학을 다녀온 그는 바로 편입 준비를 했다. 수학과 과학은 자신 없었지만, 언어와 영어는 자신 있던 그였다. 당시 편입에는 언어와 영어만 필요했으니 행운이었다. 이미 마음먹은 일이었기에 편입 학원에서 그의 성적은 당연하게도 우수했다. 학원 강사에게 “저는 어느 학교로 진학해야 할까요?”라고 묻자, “무슨 소리, 너는 쓰기만 하면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고려대와 연세대를 생각했지만 당시 두 대학이 편입 비리가 밝혀지면서, 그 해 편입이 금지됐다. 결국 그는 성균관대 경영학과로 들어가 공부를 하고, 10년간의 긴 대학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된다.
 


게임, ‘정말 재밌더라고요, 아마 4살 때부터 했던 거 같아요’

박사장의 최초 게임 경험은 4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단순하게 조작하는 콘솔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처음으로 접했다.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당시 일본 게임이 많아 할아버지에게 번역을 부탁하면서 즐기고 또 즐겼다. 태권도장에 낼 돈을 오락실에 진탕 날려 먹어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지만, 그래도 게임이 좋았다.

그는 콘솔 게임 위주로 즐겨왔고, 지금도 콘솔 게임을 좋아한다. 콘솔 게임에 대한 그의 애정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생활하면서 서서히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 스페이스 인베이더(이미지 출처: 블로그)

당시에는 인터넷보다 PC통신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콘솔 게임으로 친해진 친구들을 모아 나우누리에 ‘VG’라는 게임 동호회를 만들었다. 풀어쓰면 ‘Video Game’이다. 그러나 이미 하이텔에 ‘패미콤 통신’의 막강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호회가 있었기에 이용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경쟁심에 불타오른 그는 ‘VG’를 한번 키워보기로 마음먹는다.

박사장은 PC통신과 더불어 그 당시에 인터넷이 막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잡지보다 인터넷이 빠르다’라는 정보를 접한 그는 KT에서 제공하는 정액제 통신을 6만 5천원이란 거금을 들여 마련했다. 지금의 인터넷처럼 한번 신청하면 한 달 동안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인터넷을 이용해 각 게임사의 새로운 정보를 예의주시하며 찾은 정보는 바로 바로 업데이트했다. ‘파이널 판타지’가 플스로 이식된다더라 등 당시 지각변동을 일으킬만한 정보를 가장 빨리 올리니 이용자들은 ‘VG’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VG’는 회원수 2만 명을 찍으며 하이텔 동호회를 앞지르고 정상에 우뚝 서는데 성공한다.

그는 소니나 EA 등 거대 게임사의 정보와 뉴스,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동호회를 운영하며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경험은 후에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코리아(이후 SCEK)에 입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소니 입사 ‘한국에서 사업을 망치고 싶지 않으면 날 써라’

대학을 졸업한 그는 사회 전선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오전이면 오락실에서 한가로이 ‘버추어 파이터’를 즐겼고, 오후에는 취업 준비에 온 힘을 쏟았다. 결코 평범하게 살아온 그가 아니기에 취업 준비 과정 또한 혀를 내두를 정도로 특이하다.

우선 그는 동호회 운영 경험을 토대로 가고 싶은 회사를 조사했다. 정리해보니 약 50군데 정도였다. 그리고 그 회사의 정보를 샅샅이 뒤져 몇 십장짜리 ‘제안서’ 형태의 입사 지원서를 각각 만들어 보냈다. 내용은 ‘이렇게 해서 회사에 보탬이 되겠다’가 아니라 ‘이 회사에서 나를 꼭 뽑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어떻게 보면 매우 건방지지만,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과 자유분방함으로 똘똘 뭉친 그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연락이 없으면 좌절하기보다 ‘나를 이렇게 내쳤으니 저 회사는 이제 큰일 났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여러 회사 중에서 소니를 특히 좋아했다. 이에 뒷조사를 시작했는데 국내의 소니전자와 소니뮤직이 곧 합쳐질 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지사가 설립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입사하고 싶은 마음에 유일하게 주소를 알고 있는 일본 소니 본사 A/S센터에 두툼한 제안서(이력서)를 보냈다. 겉면에는 ‘한국에서 사업을 망치고 싶지 않으면 이 서류를 꼭 본사에 전달하시오’란 무시무시한 멘트도 곁들였다. 박사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자신감에 미쳐있었던 거 같아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후 일본에서 연락이 없자 그는 애가 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국내 소니뮤직에 전화를 걸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 전화는 안내원이 번호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당시 부사장의 방으로 연결이 됐다. 부사장과 통화를 하며 SCEK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매우 당황스러워하며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반문했다. SECK 설립은 부사장만 전달 받은 회사의 기밀사항이었던 것이다.

난리가 났다. 당시에 윤여을 소니뮤직 사장은 ‘박성철’이란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고 싶어 그에게 이력서를 요구했고, 준비가 된 그는 일전에 소니 본사에 보낸 ‘이력서를 가장한 제안서’를 다시 보냈다. 이를 본 윤사장은 “내일까지 마케팅 기획을 짜와 봐라”고 지시했고, 기회를 알아 챈 그는 운영은 어떻게, 가격은 이렇게, 론칭 날짜는 특정일 몇 시 몇 분으로 해야 한다는 그만의 정교하고 배짱 두둑한 기획안을 만들어 회사를 찾았다.

◀ 윤여을 사장(최근까지 소니코리아 대표였으나 현재 퇴임했다)

윤사장과 대면한 그는 ‘승리’를 확신했다. 아니, 차라리 ‘정복’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하다. 당시 소니 콘솔 게임 사업의 국내 유입은 최초 시도였고, 윤사장은 게임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관련된 정보를 충족시켜줄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임에 미쳐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런 인재. 그는 바로 그 인재가 본인이 될 수 있으리란 것을 확신했다.

이후 그들은 몇 번을 더 만나 SCEK 설립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렸던 까닭인지, 둘은 허물없이 가까워졌다. 단순한 예로 그는 “사장님은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러면서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려고 해요? 내가 스승이에요 스승”이라는 농담까지 건넸다고. 윤사장은 이 어이없고 ‘돌아이’같은 청년에게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던 어느 날, 윤사장은 그에게 보여줄 사람이 있다며 회사로 불렀다. 거기서 그는 일본에서 파견된 두 명의 본사 직원과 만나게 된다. 두 직원은 예전에 그가 일본 A/S 센터에 보낸 이력서를 손에 쥐고 있었고, 본인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사방으로 펼쳐 놓은 노력의 조각이 한순간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소니의 PS2, SCEK가 설립된 뒤 국내에 100만대 이상이 팔렸다

MS 입사와 초고속 승진, ‘경영자로써 꿈을 키우다’

윤여을 사장과 함께 일을 시작한 그는 SCEK가 설립 준비 단계부터 투입돼 약 2년 정도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플스1과 2를 국내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러던 중 MS가 한국에서 Xbox 사업을 할 예정인데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담당자와 이메일을 연결해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소 4~5년 이상의 경력자를 찾는다고. 그는 코웃음을 치며 “지금 한국에 콘솔이 들어온 지 2년 밖에 안됐다. SCEK 설립부터 시작해 한국에서 가장 긴 경력을 가진 사람은 바로 나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MS는 부르는 대로 연봉을 줄 테니 꼭 함께 일하자고 제안한다.

당시 그는 새로운 일이 해보고 싶었지만 SCEK를 떠나기 싫었다. 입사 이전부터 꼭 가고 싶던 회사였고, 업무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위 일본인 상사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연봉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SCEK는 플스1과 2를 성공시켰기 때문에 명성이 대단했고, 이곳에 근무하는 거 자체가 선망의 대상일 정도였다. 이러니 회사에서는 돈을 줄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 일하는 거 자체가 영광이라는 거다. 그는 몇 개월 동안 고민하다 상사와의 사이가 더 악화되자 결국 '한번 엿 되바라'는 심정으로 일을 마무리 지은 뒤, SCEK를 나와 경쟁사인 MS로 들어갔다. 그는 분명 이 당시까지만 해도 경영자로써 꿈을 키우기보다 되는 대로 막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MS에 입사한 그는 또 한번 Xbox와 Xbox360 국내 론칭에 기여를 한다. 할 땐 제대로 한다는 그의 신념이 빛을 발했는지, 대리로 입사해 1년 반마다 한번씩 진급했다. 파죽지세였다. 결국 그는 MS 내에서 최연소 부장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 MS 시절의 박성철 지사장

이렇게 약 5년 정도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그는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졌다. 콘솔도 기대했던 것만큼 국내에서 성장하지 못했고, 게임도 일이 돼버리니 재미가 없어졌다. ‘진급은 꾸준히 했지만 이것이 끝나면? 그 다음에 나는 뭐가 되지?’ 혼란스러웠다. 아마 이때부터 그는 경영자로써 꿈을 키우기 시작했던 거 같다. 직접 회사를 운영해보고 싶었던 거다.

이때 기회가 찾아왔다. 매시브에서 아시아 사업을 크게 전개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매시브는 게임 내에서 광고 사업을 진행하던 곳으로 후에 MS에 인수된다.

그는 ‘이거다’라고 느꼈다. 경영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을 때 그는 마케팅이나 홍보 등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광고 사업을 하는 매시브에 들어가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충족될 것 같았다. 결정이 내려졌으니 행동은 빠르게. 그는 스스로 MS 매시브에 지원하고 들어가  아시아 사업전략개발을 지휘했다.

매시브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SCEK나 MS에서 적응됐던 갑을관계를 벗어난 것이 큰 경험으로 작용했다. 마케팅을 담당하다보니 거래처 직원의 직급이 어떻든 관계없이 똑같이 대하며 설득해야 했고, 상대가 광고주라면 더 노력해야 했다. 이 과정을 겪으며 그는 회사 운영 시 내부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들을 배우게 된다.

박성철 지사장은 당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경영의 꿈을 가졌을 때 제가 재벌 아들도 아니니 당연히 월급 사장이 돼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연히 하는 것과 준비된 상태에서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SCEK와 MS에서 사업을 추진했던 경험과 매시브에서의 경험이 합쳐지면 무언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죠.”

▲ 박성철 지사장은 MS에서 Xbox와 Xbox360 국내 론칭 작업에 참여했다


에픽게임즈코리아 설립과 지사장 발탁

매시브에서 근무하며 기회를 엿 보던 중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에픽게임즈의 제이 윌버 부사장이 08년 KGC에서 언제가 한국에 지사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언급한 것. 그는 ‘이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겠다. 무조건 내가 하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에픽게임즈의 정보를 서서히 수집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불안해졌다. 다른 이에게 선수를 빼앗기기 싫었던 거다.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아무런 기대 없이 당시 MS 스튜디오 대표로 있던 재미교포 3세 세인킴에게 메일을 보냈다. 에픽게임즈 쪽에 추천서를 써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일종의 청탁인 셈. 그는 평소 스타일대로 ‘난 자신이 있고, 이 일은 내가 할 수 밖에 없다’는 형태로 작성했다.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추천해줄 수 없다는 것. 순간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과도한 욕심에 속물처럼 보인 것은 물론, 고위직과 쌓은 친분관계까지 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그는 자신의 메일함에서 한통의 메일을 발견한다.

“Greeting from Epic Games...”

놀라운 일이다. 후에 알고 보니 추천을 부탁 받은 세인킴은 회사 메일에서는 거절했지만, 그날 밤 바로 에픽게임즈에 전화를 걸어 박사장을 추천했던 것이다. 또 한번 드라마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메일의 발송자는 제이 윌버 부사장이었고, 내용은 “세인킴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당신과 꼭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데,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란 내용으로 구성돼 있었다. 과연 그는 메일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됐다!’라는 설레는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뭐야?’라는 아리까리한 기분이었을까. 아마도 전자가 분명할 것이다.

이후 그는 제이 윌버 부사장과 한국에서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만나기에 앞서 늘 평소 친했던 거래처 직원들에게 ‘왜 언리얼 엔진을 안 쓰는지’, ‘이 엔진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꼼꼼히 분석한 뒤에 다이어리에 기록했다. 그리고 제이 윌버와 만나는 날이면 이 자료를 토대로 썰을 풀었다.

제이 윌버도 이 괴상하지만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남자에게 끌렸던 것이 분명하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차 안에서 제이 윌버는 그의 손을 지긋이 잡은 채 조용히 한 마디를 건넸다. “같이 일해봅시다” 사랑한다는 고백이 아니었기에 그의 대답은 당연히 “OK”였다.

현재 에픽게임즈코리아에서 기술 지원 부장을 담당하는 잭 포터도 여기서 만났다. 제이 윌버는 그에게 잭 포터가 유능한 부하직원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첫 만남에서 잭 포터는 그에게 "출근은 몇시로 하죠?"라고 물었다. 학창시절은 물론 SCEK와 MS에 근무했을 때도 지각과 결근을 밥먹듯이 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무조건 10시 30분"

▲ 에픽 게임즈의 제이 윌버 부사장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 현재의 박성철 지사장

박성철 지사장은 현재 평일 오후와 주말에 틈틈이 시간을 내 성균관대 MBA 과정을 들으며 공부하고 있다. 그는 “이직을 할 때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과 도전할 수 있는 것의 비율이 70:30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면서 현재 본인의 위치는 비율이 60:40인 거 같아 이 갭을 채우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에픽게임즈코리아 첫 출근을 하기에 앞서 그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고 했다. 회사 운영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 하지만, 한국의 이해도가 높아 본사와 지사 간에 원활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제이 윌버 부사장이 있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제 몫을 톡톡히 해주고 있어 의외로 힘든 것은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에픽게임즈코리아가 좋은 회사에서 그레이트한 회사가 되기까지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겠다고 설명했다. 아직 초창기이기 때문에 더 좋아질 수 있는 외부 사업도 있고, 성장해야 하는 사업도 분명 있으니 이러한 것들을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더 발전하겠다는 거다.

기자는 그에게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란 질문을 던지고 싶었으나 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본인도 성공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게임 업계에서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으냐?”란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해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회사는 최대한 이윤을 내는 것이 존재 이유이지만, 살면서 반드시 이것만이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우리 회사가 50만 버는 것이 지당하다면 더 이상 욕심내지 않을 것입니다. 엔진 사업과 관련해 우리 에픽게임즈코리아와 함께 일하는 회사는 결코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어요. 이렇게 해주겠다 허풍치고 큰소리 못 치지만 이러한 마인드로 업무를 하다 보면 ‘에픽은 오래도록 같이 해도 손해가 없는 믿을만한 파트너’라는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이 말을 듣고 보니 살짝 웃기기도 했다. 한때 동료의 책을 훔쳐 혼자 대학에 진학하고, 믿어 준 소니를 뻥 차버린 채 경쟁사로 넘어가버린 그가 아니던가. 경영자의 길을 선택하며 그도 모르는 사이 변한 것일까? 그래도 그가 직접 한 말이니 왠지 모를 믿음이 생긴다. 그는 언제나 본인이 내뱉은 말은 지켜왔고, 이를 이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 왔다. 그래서 믿고 싶은 거다.

한때 막 살기도 했지만 지금의 그는 누가 뭐래도 에픽게임즈코리아의 지사장이다. 물론 게임업계에 젊은 CEO나 사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사장처럼 특별하게 살아 온 사람은 없을 것이니 충분히 1%라 불릴만하다. 잦은 지각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며, ‘드래곤볼’의 프리더를 보며 우두머리로써의 교훈을 느끼는 사장도 아마 보기 드물 것이다.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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