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국내 게임사 중에서 넥슨은 꽤나 창의적인 회사였다. 비록 첫 시도 자체는 기존 해외 게임들에서 먼저 한 경우도 많았지만, 넥슨은 후발주자로써 이러한 요소들을 잘 취합하고 완성도를 높여 대중적으로 만드는 데 천부적인 능력을 지녔다. 불행히도 최근 10여년 간은 그런 특징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넥슨의 개발 DNA가 죽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기간 중 나온 넥슨 신작 중에서는 야생의 땅 듀랑고 정도가 위에 부합한다고 본다.
그런 넥슨이 새로 마음을 다잡고 신선한 신작들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2년이 지났다. 아마도 이번 지스타 2022에서 그 결과물들이 선보여질 것이다. 퍼스트 디센던트, 베일드 엑스퍼트, 아르젠트 트와일라잇, 더 파이널스, 워헤이븐 등 다수의 신작이 개발 중인 가운데, 이번 지스타가 넥슨 개발 DNA 부활을 증명하는 분수령이 될 것인지가 관심사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봐야 할 타이틀이 있다면 단연 워헤이븐이다. 워헤이븐은 마비노기와 마비노기 영웅전, 그리고 앞서 언급한 야생의 땅 듀랑고 등을 개발한 이은석의 차기작이다. 작년 8월 프로젝트 HP라는 이름으로 첫 테스트를 거쳐, 지난 10월부터 11월 2일까지 스팀에서 또 한 차례 테스트를 진행했다. 지스타 출전 여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가장 최근에 테스트를 진행한 바 있으니 현장 피드백 측면에서라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워헤이븐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 게임이 기존 국산 게임들과 궤를 달리 하기 때문이다. 워헤이븐은 수십명 단위가 맞붙는 중세 공성전 장르다. 쉽게 설명하자면 오버워치 등 PvP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점령 미션을 칼과 창, 도끼와 방패, 활 등이 있는 중세 배경으로 옮기고, 동시 플레이 인원을 수십 명으로 늘려 실제 전장에 뛰어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PvP 액션 게임이다. 선구자인 시벌리, 그 뒤를 이어 나온 모드하우, 최신작으로 볼 수 있는 시벌리 2 정도가 대표작이다.
위에서 예로 든 세 개의 게임은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사실성이다. 많게는 수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갑옷을 껴입고, 단단하고 커다란 방패를 손에 쥐고, 이를 파괴할 정도의 묵직한 무기를 휘둘러야 하는 중세 전투의 현실을 최대한 고증했다. 따라서 판타지 배경 게임처럼 잔상이 남을 정도의 검 휘두르기나 수 미터 점프, 적의 뒤로 순식간에 돌아 들어가는 환상적인 움직임, 마법이나 주술은 일절 없다. 묵직하게 뛰어가고, 검을 끙끙대며 휘두르고, 적의 움직임을 봐 가며 방어나 회피, 방해 동작으로 맞받아치고, 난전 와중에 피아를 구분하고, 각종 공성 병기를 활용해 가며 목표를 위해 전진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전투의 템포가 느린 편이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도 이러한 집단 공성전 게임은 대중적이라기보다는 마니아들이 즐기는 마이너 장르로 분류되고 있다. 빠르고 화려한 액션이 없다 보니 신규 유저들에게 눈도장을 찍기도 어렵고, 은근히 배울 점도 많은지라 진입장벽도 높은 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럽 중세 뽕'이 대중적이지 못 한 국내에서는 이러한 장르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서양에 비해 더 높다.
넥슨과 이은석이 뛰어든 장르가 바로 이것이다. 잘 닦여 있긴 커녕 해외에서도 마이너에 속한 길, 그야말로 100% 모험이다.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를, 국내에서 검증된 바도 없이, 넥슨의 개발 기술력을 투입해 만들겠다는 시도. 넥슨의 다른 프로젝트들도 현재 국내 게임시장에서 어느 정도 차별성을 띄고 있지만, 워헤이븐이야말로 남들이 걷지 않는 수풀투성이 벌판에 길을 내는 개척자 같은 게임이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표현하는게 더 알맞겠다. 작년 8월, 아직 게임명이 프로젝트 HP였던 시절 진행했던 첫 테스트는 기존 공성전 게임의 법칙을 상당 부분 따르면서 온라인게임 명가인 넥슨 특유의 기술력과 편의적 시스템이 상당수 섞인 모습이었다. 쉬운 협업을 위한 분대 시스템을 넣고, 적의 공격 방향이나 피아식별 표시가 더 눈에 잘 띄게 하고, 포 아너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전투 시스템을 살짝 섞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대쉬나 킬스트릭을 통한 변신 시스템을 넣었다. 타격감 역시 남달랐는데, 적어도 저 위에 예로 든 게임들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역시 기반을 시벌리나 모드하우 등에 두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고, 템포 역시 위 두 게임과 비슷하게 느릿느릿했다. 공성전 게임의 매력과 동시에 대표적 약점까지도 그대로 가져간 셈이다. 여기에 킬스트릭을 통한 변신 캐릭터들이 일반 캐릭터에 비해 너무 강한 나머지, 게임 전체가 변신만을 바라보고 플레이 하게 되는 느낌을 줬다. 입문 난이도도 결코 낮지 않아, 대중적인 흥행이 가능할 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한 번 빠져든 마니아층은 즐겁게 플레이 했지만 말이다.
제작진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한 듯 싶다. 지난 10월 정식 명칭인 워헤이븐을 앞세우며 시작된 두 번째 테스트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약점 부분을 아예 뿌리째 바꿔 버렸다. 캐릭터 움직임을 빠르게 해 템포를 마영전에 근접할 수준으로 빠르게 했고, 일반 캐릭터의 스킬 위력과 가짓수를 늘려 전체적으로 상향시켜 변신 캐릭터와의 격차를 줄였다. 스태미너와 모션 페인트로 대표되던 낯선 공방 시스템도, 보다 익숙한 쿨타임 스킬 사용 위주로 바꿨다.
지금 모습을 보면 확실히 위에서 언급한 단점들은 사라졌지만, 게임의 뿌리가 바뀐 까닭에 앞서 선보였던 공성전 특유의 맛도 상당수 희석됐다. 그 결과 정통 공성전과 액션RPG 중간 어디쯤에 있는 모양새다. 일부는 공성전의 느낌이 살지 않는다며 불호를 표했으나, 일부는 더 익숙하고 쉬운 시스템에 기뻐하기도 한다.
현재 모습이 개발진이 원하는 이상적인 워헤이븐인지는 잘 모르겠다. 올해 지스타를 통해, 혹은 향후 추가 테스트나 앞서 해보기 등을 통해 또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아니면 지금 형태를 유지한 채 세부 사항만 수정하거나, 아예 HP 시절로 회귀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개척자로서의 숙명인데, 국내에서 이처럼 테스트 단계부터 다방면의 시도를 한 개척자적 게임이 참 오랜만이라는 것에서 현실에 대한 씁쓸함과 이 게임에 대한 호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워헤이븐이 출시까지 좀 더 시간을 넉넉히 잡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으면 한다. 워헤이븐의 미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뉠 것이다. 정통 공성전의 맛을 살리느냐, 대중성을 살리느냐, 둘 다 살리느냐, 둘 다 놓치느냐다. 지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둘 다 살리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 사이버펑크 2077을 비롯한 몇 가지 기대작의 실망스러운 초기 발매 이후 게이머들은 대작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다려 주는 인내심이 생겼다. 넥슨 역시 10년씩이나 조용했던 만큼, 지금 와서 서둘러 게임을 하나 더 내는 것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향후 1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차기작이 나오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워헤이븐이 테스트를 종료하며 남긴 말이다. 다음에 워헤이븐이 선보일 '보다 발전된 모습'이 기대된다. 더불어, 부디 올바른 방향을 잘 잡아 대중성과 독창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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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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