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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라인게임 10년, 그 영욕의 세월(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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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게임메카 김시소 기자

 ※ 관련기사: [창간기획] 온라인게임 10년, 그 영욕의 시간 (上) :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의 시대

완숙기(2004~2005)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세계를 집어 삼키다’

Key Word: WoW, 캐주얼, 아이템 현금거래

2004년 3월 클로즈베타테스트를 시작한 블리자드의 첫 번째 온라인게임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온라인게임 강국이라 자부했던 한국의 자존심을 구겨놨다. 특히 ‘리니지’ 시리즈로 국내 MMORPG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대기업으로 성장한 엔씨소프트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출현에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가 2005년 초 주요 임원진들과 개발자들에게 “우린 이류였다. 분발하자.”라고 말한 사실은 ‘월드오브워크래프트’가 한국 게임업계에 얼마나 큰 자극을 주었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대작 온라인게임들의 등장과 캐주얼게임의 부상

2004년, 2005년에는 자본, 개발력 등에서 어느 정도 토대를 다진 개발사들이 대작을 표방한 MMORPG 프로젝트를 경쟁적으로 발표했다. 이른바 ‘빅3’로 불리웠던 웹젠의 ‘썬’, 한빛소프트의 ‘그라나도에스파다’, 넥슨의 ‘제라’ 등이 이 시기 공개된 대작 MMORPG 프로젝트들. 이들 개발사들은 주먹구구식으로 마케팅 됐던 기존 게임들과 달리 실제 서비스 전에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하며 게이머들의 기대를 높였다.

2004년은 캐주얼게임이 한국 게임시장을 재편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시기 등장한 캐주얼게임들은 ‘프리스타일’, ‘오디션’, ‘겟엠프트’, ‘마구마구’, ‘권호’ 등이 있으며, 대표주자는 넥슨의 레이싱게임 ‘카트라이더’와 드래곤플라이의 FPS ‘스페셜포스’였다. 2004년 6월 오픈베타서비스를 시작한 ‘카트라이더’는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었다. 쉽고 편한 조작, 귀여운 카툰랜더링 풍의 캐릭터, 독득한 맵디자인을 강점으로 내세운 ‘카트라이더’는 그 해 8월 회원 수 100만, 10월 동시접속자수 10만을 넘어서며 ‘국민게임’으로 등극했다.

2004년 7월 오픈베타서비스를 시작한 ‘스페셜포스’는 대중에게 온라인 FPS의 개념을 확실히 심어주며 FPS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했다. ‘스페셜포스’는 2004년 9월 100만 회원가입 달성, 2005년 8월 동시접속자 10만 명을 돌파하며 퍼블리셔 네오위즈의 확실한 ‘돈지갑’ 역할을 했다. 특히 밸브사와 ‘카운터스트라이크’ 스팀서비스를 놓고 대립했던 PC방 업주들이 ‘스페셜포스’를 대체게임으로 선정하면서 빠르게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이들 두 게임은 뛰어난 부분유료화모델로 단일 캐주얼 게임으로서는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카트라이더’는 코카콜라 같은 오프라인 상품과 연계마케팅을 펼침으로서 대중의 인지도를 높이는 동시에 확실한 수입을 챙겼고, ‘스페셜포스’ 역시 게임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아이템을 핵심으로 한 부분유료화모델을 제시, 높은 수익을 올렸다. ‘스페셜포스’의 부분유료화 모델은 2006년 이후 동시접속자수에서 ‘서든어택’에 밀린 후에도 매출면에서는 밀리지 않는 파워를 보여줬다.

두 게임의 공통점은 또 있다. KeSPA(한국e스포츠협회)의 공인을 받은 국산 e스포츠게임이라는 것. ‘스타크래프트’ 단일게임 일색으로 스포츠라는 이름이 무색했던 e스포츠계에서 국산종목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두 게임을 평가할 수 있다. 

▲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캐주얼 게임계의 쌍두마차
 

덩치 커지자 이리저리 부딪히는 게임회사들

2000년대 들어 큰 규모로 성장한 몇몇 게임업체들은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마찰음을 내기시작했다. 특히 게임회사와 유저의 대립각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음성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아이템현금거래 그리고 그로 인한 광범위한 계정압류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위로 떠올랐다. 특히 ‘리니지’ 시리즈에서는 계정압류를 두고 법정분쟁이 일어날 만큼 유저와 게임회사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안티 엔씨’로 출발한 온라인소비자연대 1,060명은 2004년 5월 엔씨소프트의 불성실한 게임운영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표면상으로는 잦은 서버다운과 오류를 내세웠지만 현금거래로 인한 영구계정압류가 실제 원인이었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웹젠이 ‘뮤’의 사설서버를 운영하던 PC방 업주를 형사고소 하기도 했다.

온라인게임 아이템거래 문제는 2004년 10월 국정감사에 오르면서 게임계 밖에서도 집중 조명 받기 시작했다. 문화관광부는 아이템거래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며 `게임역기능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고, 당시 유일하게 게임관련정책을 연구했던 게임산업개발원은 아이템 현금거래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실태조사를 통해 제재방안을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2004년 한국에서 이루어졌던 아이템 거래규모는 8,000억 원 수준(추정)으로 이는 전해에 비해 약 두 배 가량이 증가한 수치였다.   

또 넥슨은 2005년 ‘PC방 정량과금제’를 도입하면서 일선 업주들과 큰 마찰을 빚었다. 당시 넥슨이 추진한 PC방 종량제는 넥슨존 스페셜, 카트존 등의 정액제를 폐지하고 사용시간에 따라 금액을 책정하는 요금제로, ‘카트라이더’ 등 넥슨게임 사용시간이 많은 일부 PC방들은 ‘사실상 요금제인상’이라고 불만이 터뜨렸다.

과금방식을 둘러싼 넥슨과 PC방 업주들의 갈등은 결국 2005년 6월 전국 PC방 업주들의 모임인 인터넷문화협회에 의해 대규모 시위사태로까지 번졌으며 넥슨 불매운동에 전국적으로 1000개의 PC방이 참여하는 등 게임회사와 PC방 업주들 사이에 큰 감정의 골을 남겼다.

 

 ▲  넥슨과 PC방 업주의 마찰은 유혈사태까지 불러 일으켰다


그라비티의 매각, 해외업체 한국으로..

2005년 8월에는 그라비티가 일본 소프트뱅크사로 매각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8월 31일 그라비티 김정률 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라비티의 나스닥지분 52%를 일본 소프트 뱅크 계열사인 EZER 및 테크노그루브에 매각했다.

같은 해 9월 12일 재일교포 사업가 류일영(당시 EZER 대표)씨가 기존 윤웅진 대표와 함께 그라비티의 회장겸 공동CEO로 내정됐으며, 9월 26일 기존 윤웅진 대표가 갑작스레 사임하며, 류일영 대표의 회장 및 단독 CEO체제로 경영진이 구성됐다.

인수에 이어 빠른 속도로 그라비티 경영진을 교체한 소프트뱅크는 나스닥 공시를 통해 김정률 전 회장을 600만 달러 공금유용혐의로 내부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하는 등 회사 정리수순을 밟아갔다. 이 과정에서 윤웅진 전 대표가 명예회손을 이유로 그라비티를 고발하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라비티의 매각은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논란거리를 낳았다. 게이머들은 그라비티를 한국회사로 볼 것이냐?, 김정률 회장의 회사매각에 대한 책임론, 그리고 그라비티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논쟁을 펼쳤다. 한국 게임계는 나스닥에까지 진출한 한국업체가 외국회사로 매각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며 2005년 가을을 보내야 했다.     

▲ 2006년 싸이칸으로 게임계에 복귀한 김정률 (前) 그라비티 회장과 류일영 그라비티 회장


와우! 온라인게임개발사로 변신에 성공한 블리자드  

20세기 후반 ‘스타크래프트’가 이 땅을 휩쓸었다면 2004년부터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블리자드는 이 두 게임으로 한국 땅에 ‘눈보라(블리자드)’를 일으키며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성공을 처음부터 예견한 이는 별로 많지 않았다. 이전에 상륙한 해외 게임들이 한국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최소한 온라인 게임개발 특히 MMORPG에 있어서는 밀릴 것이 없다는 내부의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4년 11월 국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 가기 시작했다. 블리자드 코리아를 통해 직배로 공급된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오픈 6일 만에 서버를 44대 증설하며 폭발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당시 게임트릭스의 자료에 의하면 2004년 11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오픈베타테스트 직후 ‘리니지’과 ‘리니지 2’는 이용률이 각각 12.04%, 25.24% 감소했으며, ‘RF온라인’의 경우 55.69%가 감소했다. 또 ‘바람의 나라’, ‘거상’, ‘나이트 온라인’ 등이 20% 대의 이용량 감소를 보이며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후폭풍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2005년 1월 상용화를 단행하며 24,750원(리니지 29,700원)’ 이라는 가격을 책정해 유저들의 반발을 샀다. 한국 유저들은 패키지로 판매되는 해외의 판매방식을 감안하더라도 국내의 요금이 높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런 상황은 ‘와우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졌으나 결국 그 해 4월 90일 요금을 8%정도 인하하는 선에서 마무리 됐다.

하지만 불매운동에도 불구하고 높은 게임성을 바탕으로 한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상용화는 수치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며, “비싸면 하지 말라.”라는 배짱 마케팅의 진수를 보여줬다. 이후 블리자드는 2006년 4월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서비스 1주년을 기념해 30일 19,800원으로 가격인하를 실시했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2004년과 2005년은 외부의 충격과 내부의 진통으로 인해 한국 게임계의 성장통이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처들은 2006년에 들어서면서 ‘내부혁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 WOW는 몰입도 높은 콘텐츠와 높은 게임성으로 단번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휴지기(2006~2007) ‘국경 없는 결합, 재도약을 노리다.’

Key Word: 콘텐츠, 결합, 혁신, 일본, 바다이야기

엔씨소프트는 2000년대에 들어 해외의 기술력을 이용한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미 2001년 ‘울티마 온라인’으로 명성을 얻은 리처드 게리엇이 엔씨소프트에 합류했고, 이를 시작으로 북미에서 몇몇 개발사들이 엔씨소프트의 스튜디오 형식으로 온라인게임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2005년 4월, 엔씨소프트가 자본을 투입한 ‘길드워’가 전세계적으로 서비스에 돌입했으며 2006년 2월에는 ‘시티오브히어로’가 오픈베타테스트를 진행했다. 국내 자본과 해외의 기술력이 결합돼 탄생된 이 두 게임은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지만 한국 시장에서는 별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잇달아 세계시장에 두 게임을 선보인 엔씨소프트는 세계시장에서 이름있는 게임회사로서 인정을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MMORPG 빅3의 연이은 참패, 굴욕의 시간들

2006년에는 2004년과 2005년에 공개됐던 이른바 ‘빅3’게임 ‘썬’, ‘그라나도 에스파다’, ‘제라’ 등이 정식으로 오픈베타테스트와 상용화 서비스를 진행하며 대중의 시험대에 올랐다.

당초 투입된 자본이나 개발규모에서 대작을 표방했던 이 세 게임은 그러나 오픈 이후 기에못 미치는 게임성으로 대중의 철저한 외면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제라’는 2006년 8월 부분유료화로, ‘썬’ 11월 부분유료화로 정식서비스를 실시했으며, 7월 19,800원으로 정식서비스를 실시한 ‘그라나도 에스파다’는 12월 부분유료화로 전환했다.

오히려 ‘빅3’에 끼지 못했던 써니YNK(현 YNK 코리아)의 MMORPG ‘로한’이 조용한 가운데 2006년 2월 19,800원으로 상용화에 돌입 현재 국내 MMORPG로서는 마지막으로 정액제 상용화에 성공한 게임이 됐다. 써니YNK는 당시 아이템거래를 금기시하던 분위기에서 게임 개발사로서는 최초로 아이템베이와 MOU를 체결해 ‘로한’에서 안전한 아이템 거래를 보장했다.       

`빅3`의 몰락은 한국 게임계의 위치를 세계 속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계기가 됐다. 저마다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아성에 도전하겠다며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이미 눈이 높아진 유저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가슴 아픈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해외 콘텐츠+한국 기술력 혹은 그 반대, 국경 없는 게임들 선보여

한국의 발달된 네트워크 기술은 온라인 시장에 진출하고 싶으나 경험이 부족한 일부 국가들에게 매력적이었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콘텐츠들을 보유한 일본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성숙한 비디오 게임시장과 메가히트급의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체 개발력으로 양질의 온라인 게임을 만들어내기 힘들었던 일본은 한국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의 콘텐츠와 한국의 기술력이 만나 ‘SD건담 캡슐파이터’와 ‘드래곤볼 온라인’, ‘이스 온라인’ 등이 만들어졌다. 이들 게임은 모두 CJ인터넷이 퍼블리싱을 담당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CJ 인터넷은 ‘대항해시대’를 시작으로 ‘진삼국무쌍 B,B’ 등 일본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온라인게임도 퍼블리싱하며 일본 온라인게임을 국내에 선보였다.  

또 ‘피파온라인’의 경우 EA의 킬러 타이틀 축구게임 ‘피파’시리즈를 네오위즈가 온라인화 하는데 성공해 눈길을 끌었다. EA가 자체적으로 진행했던 ‘피파’ 시리즈의 온라인화 프로젝트가 거듭 실패한 후 한국 개발팀에 의해 성공적으로 컨버전 됐기 때문에 ‘피파온라인’은 한국의 온라인 게임 개발력의 위상을 한 단계 높여주는 계기가 됐다. 네오위즈는 이 인연으로 2007년 EA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EA 프랜차이즈를 이용한 4종의 온라인게임들을 만들 수 있게 됐으며 천 억원대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의 자본과 해외의 기술력이 결합된 게임들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서 밝힌 엔씨소프트나 웹젠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웹젠의 경우 2005년 2월 ‘그랜드시프트오토(GTA)’의 개발자로서 이름을 알린 데이빗 존스의 신작 ‘APB(All Points Bulletin)’의 퍼블리싱권을 획득했다고 발표했으며 자체적으로 제작중인 ‘헉슬리’에도 해외 유명 FPS게임 ‘언리얼토너먼트’의 개발자들을 합류시키는 등 검증된 해외개발인력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엔씨소프트는 2001년 리차드 게릿엇 영입을 필두로 아레나넷, 크리틱 스튜디오 등 해외의 개발스튜디오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투자, 인수 및 퍼블리싱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며, 2006년 그 결과물 중 일부인 ‘길드워’와 ‘시티오브히어로’ 등을 전세계적으로 론칭 시켰다.     

▲ 해외자본+국내기술 혹은 국내자본+ 해외기술의 결과물인 `피파온라인`과 `길드워`


2006 월드컵과 축구게임의 몰락

2006년에는 월드컵 열기를 타고 풋살을 소재로 한 온라인 축구게임들이 유난히 많이 선보였다. 이 시기 공식적으로 공개된 축구게임 만해도 ‘익스트림사커’, ‘레드카드’, ‘킥오프’, ‘슈팅슈퐁’, ‘풀타임’, ‘킥스온라인’, ‘아트사커’ 무려 10종이 넘었으나 실제 테스트까지 이루어진 게임은 ‘레드카드’, ‘익스트림사커’, ‘킥오프’, ‘킥스 온라인’ 정도였으며,  2007년 현재까지 상용화를 이뤄낸 게임은 전무했다.              

축구게임들의 부진은 월드컵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빠듯한 일정에 맞춰 개발돼 게임으로서의 완성도가 부족했으며, 콘텐츠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과 시장조사 등 철저한 프리프로덕션 단계 없이 ‘감’으로만 프로젝트가 진행된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리니지 시리즈의 수입감소와 새로운 길 모색

엔씨소프트는 2004년을 기점으로 회사의 밑을 받치고 있던 ‘리니지’ 시리즈의 수입이 감소하며 해가 갈수록 매출, 영업, 순이익이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리니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으며 이와 함께 엔씨소프트의 하락세가 단기적이 아니라는 전망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 온라인게임의 상징과도 같은 엔씨소프트는 이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있었다. 해외 기술력과 손을 잡은 것도 이러한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씨소프트는 2006년을 기점으로 유난히 혁신과 변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캐주얼 중심이던 ‘게임포탈 플레이엔씨를 게임정보와 주력게임이 들어간 종합포탈형식의 사이트로 리뉴얼 하기 시작했으며, 내부 개발팀들도 정비하기 시작했다.      

2006년이 되면서 엔씨소프트는 리니지 시리즈 이외의 MMORPG도 하나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 선두주자는 ‘아이온’. 2007년 여름 첫 클로즈베타테스트를 앞두고 있는 ‘아이온’은 ‘리니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엔씨소프트의 노력을 평가할 수 있는 게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  리니지의 하락세는 곧 엔씨의 하락세로 이어진다
 

 

▲ `아이온`은  한국 MMORPG와 엔씨소프트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스타크래프트 2의 발표와 또 한번의 도전

2007년 5월 19일 블리자드는 한국에서 진행된 월드와이드인비테이셔널을 통해 ‘스타크래프트 2’를 발표했다. 전작 ‘스타크래프트’는 1998년 발매 이후 2006년까지 전세계에서 950만장이 팔렸고 이중 450여 만장이 한국에서 소비됐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블리자드가 한국에서 ‘스타크래프트 2’를 발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스타크래프트’는 한국의 PC방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데 일조했으며 초고속 인터넷이 단기간에 전국적으로 확장된 사회적인 현상은 한국 온라인게임산업의 덩치를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점에서 다시 등장한 ‘스타크래프트 2’가 한국 게임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98년 ‘스타크래프트’가 누렸던 그 영광을 ‘스타크래프트 2’가 현재 한국 시장에서 그대로 재현하기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기엔 게임산업과 시장이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 있다.       

이상으로 1994년 ‘쥬라기공원’에서부터 2007년 ‘아이온’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2’에 이르기까지 한국 온라인게임의 역사를 되짚어 봤다. 한국 온라인게임은 10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온라인 게임 분야에서라면 한국은 어느 누구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실을 더 다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한국 온라인게임이 격변하는 세계 게임계에서 계속 의미 있는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성장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국내 게임계 그리고 게임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의 한국의 게임산업은 일년 단위로 몇 배씩 덩치를 키워갔던 시기는 지났다. 사람으로 따지면 신체적 성장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생전반기에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될 수 있는 사춘기 혹은 청소년기인 셈이다. 현재 게임업계에서 내실을 키우라는 주문이 집중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참고자료: 게임메카, PC파워진, 대한민국 게임백서

▲ 히드라를 밟고선 마린 영웅 `타이커스 핀들레이`.


블리자드는 한국시장을 다시 한번 집어삼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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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2004년 11월 23일
플랫폼
온라인
장르
MMORPG
제작사
블리자드
게임소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토대로 개발된 온라인게임이다. '워크래프트 3: 프로즌 쓰론'의 4년이 지난 후를 배경으로 삼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플레이어는 얼라이언스와 호드, 두 진...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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