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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JRPG 마에스트로, 호리이 유지&사카구치 히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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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게이머에게 RPG라는 용어(장르)는 낯설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면, 나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준 RPG 몇 종이 떠오른다. 괜히 기분이 좋고 잔잔한 여운이 남는다.

그러나 RPG 라는 용어가 생소하던 시절도 있었다. 북미에서는 1974년 등장한 테이블 보드게임 [던전앤드래곤]이 시초가 된 이후 PC 플랫폼을 기반으로 [울티마] [위저드리] 등의 게임이 나오면서 RPG라는 용어가 인지도를 갖기에 이르렀다. 판타지의 로망도 여기서 커졌다. 그러나 이런 북미식 RPG는 대부분 하드코어함을 갖추고 있어 지구 반대편에서는 정서가 맞지 않았다.

이는 게임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적 기반이 갖춰진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두 종의 게임이 등장하면서 RPG는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다. 판타지 세계관이나 룰은 북미식 RPG와 비슷하지만, 여기에 따뜻하고 감성적인 기운을 넣으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RPG 시대를 열었다. 아시아는 물론 북미에서도 맹위를 떨친 일본식 RPG의 탄생 배경이다.

오늘 소개할 두 인물은 바로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를 창조해낸 호리이 유지와 사카구치 히로노부다. 각자 에닉스와 스퀘어에서 두루 활약하며 일본식 RPG를 글로벌 게임장르로 키워냈고, 그렇게 성장한 두 회사는 합병 이후 스퀘어에닉스로 탄생해 지금도 거대 게임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다. 경쟁자이자 친한 동료였던 두 남자. 대체 이 두 남자는 어떤 과정에서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를 창조해냈을까?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드래곤퀘스트의 호리이 유지(좌)와 파이널판타지의 사카구치 히로노부(우)

장난기 넘쳤던 한 소년, 호리이 유지

호리이 유지는 1954년 효고현 스모토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장난기가 있었던 그는 누구보다 ‘재미있는 것’ 찾기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덕분에 문화 콘텐츠에 자연스레 관심을 두게 된다. 특히 그는 만화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는데, 자신의 감정이나 사상을 단순히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그림을 곁들이면 훨씬 재미있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신으로 불리는 데스카 오사무의 만화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호리이 유지 역시 그의 만화를 즐겨봤다.

결국, 호리이 유지는 중학교 입학 이후 만화가라는 꿈을 품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화를 그리는 것에도 ‘재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현실을 무대로 하는 것보다 가상세계 중심의 SF 장르에 더 관심을 보였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와세다대학 국문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와세다대학은 다수의 유명 만화가를 배출해낸 명문으로, 호리이 유지 역시 자신의 꿈인 만화가의 길을 위해 해당 학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시절 호리이 유지는 ‘만화 연구’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꿈을 차근차근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는 워낙 글쓰기에 소질이 있던 만큼, 만화 그리기보다 저술 활동에 집중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특히 학교를 졸업하고 신문사나 잡지사에 들어간 선배들로부터 원고 의뢰를 많이 받았는데, 여기에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서서히 만화가의 꿈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졸업 이후 만화가의 길을 완전히 접고, 저술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저술가로 살던 그가 게임을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27살이 되던 해였다. 당시 일본에서 붐을 일으킨 마이크로 컴퓨터를 접했기 때문이다. 자료 정리를 목적으로 구한 컴퓨터였지만, 거기서 발견한 게임이라는 녀석은 이상하리만치 흥미로웠다. 결국, 호리이 유지는 베이직 등의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며 컴퓨터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급기야 [스페이스 인베이더] 같은 게임이나 운세 프로그램 등을 만들며 친구들에게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그 자신 역시, 컴퓨터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게임을 대부분 접해보면서 게임이 주는 ‘맛’에도 푹 빠지게 된다.

이후 1982년, 그의 운명을 바꿀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에닉스라는 작은 회사가 아마추어 게임 공모전을 진행한 것이다. 당시 에닉스는 매우 초라한 회사였는데, 해당 공모전을 통해 게임 사업을 펼치려는 계획이었다. 호리이 유지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 잡지 <주간 소년점프>에서 자신이 즐기던 게임을 주제로 한 글을 올리고 있었고, 운명의 장난인지 그에게 에닉스의 게임 공모전을 취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를 수락하고 관련 자료를 받아 정리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의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게임 공모전 응모 용지와 참여 방법 가이드였다.

용지를 손에 쥔 호리이 유지는 바로 이 상황이 자신에게도 변화를 줄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걸 직감했다. 결국, 그는 평소에 틈틈이 만들었던 게임 [러브매치 테니스]를 가지고 해당 공모전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공모전 발표일, 그는 현장에서 자신의 게임 [러브매치 테니스]가 입선된 것을 확인하게 된다.


▲ 에닉스 게임 공모전에서 입선된 호리이 유지의 러브매치 테니스

꼬마도 즐길 수 있는 RPG를 만들고 싶다! [드래곤퀘스트]의 탄생

호리이 유지는 직접 만든 [러브매치 테니스]가 에닉스를 통해 발매되는 광경을 보고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 자신이 갖춘 능력을 ‘게임 개발’에 쏟아 부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당시 게임 공모전에서 대상은 훗날 춘소프트를 설립하고 비주얼 노벨로 일본 전역에 명성을 퍼뜨린 천재 개발자 나카무라 코우이치의 [도우도우]라는 게임이 차지했다. 이 게임은 PC와 패미컴(PC 이후)으로 발매됐는데,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호리이 유지는 취재를 통해 나카무라 코우이치와 인연을 쌓게 되는데, 말이 통했던 둘은 나이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친해져 함께 게임을 즐기거나 의논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어쨌거나, 호리이 유지는 1983년 에닉스의 의뢰로 또 하나의 게임을 준비한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친분이 이어진 나카무라 코우이치와 함께였다. 둘은 의기투합해 퍼즐 어드벤처 [포토피아 연속 살인사건]을 만들어 내놓는다. 이 게임은 [도우도우] 정도의 파급력은 없었지만, 당시 일본에 없던 어드벤처 장르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얻었다. 또, 이 게임은 텍스트 기반으로 진행됐는데 탁월한 글솜씨를 갖춘 호리이 유지의 문장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이 게임 덕분에 에닉스와 우정이 더 돈독해진 호리이 유지는 이후에도 [훗카이도 연쇄 살인 - 오호츠크로 사라지다]와 [가루이자와 유괴 안내]라는 추리 어드벤처 3부작을 연달아 내놓으며 인지도를 쌓았다.


▲ 호리이 유지의 가루이자와 유괴 안내, 성인용 추리 게임이다

호리이 유지가 [가루이자와 유괴 안내]를 마무리할 당시, 일본에서는 닌텐도가 내놓은 가정용 게임기 ‘패미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크고 작은 게임사가 서서히 PC가 아닌 ‘패미콤’ 기반 게임 제작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장의 변화는 호리이 유지에게도 기회로 찾아왔다. 에닉스로부터 또 한 번 게임제작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호리이 유지는 ‘패미컴’ 기반 게임을 만들기로 작정하고 나카무라 코우이치와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침 둘은 북미에 출시돼 큰 인기를 얻었던 [울티마]와 [위저드리]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호리이 유지는 RPG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갖가지 재미와 감동을 누구보다 높게 평가해, 해당 장르의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벽이 너무 컸다. 두 게임은 너무 하드코어한 면이 있어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감이 있었고, 일본 게이머에게 RPG라는 용어 자체도 낯설었기 때문이다.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울티마]와 [위저드리]가 갖춘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되 꼬마도 할 수 있는 쉬운 형태로 게임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무기 중 하나인 ‘글솜씨’로 일본 게이머들에게 RPG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는 것이 그 계획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잡은 호리이 유지는 바로 실행에 돌입했다. 우선 게임 기획, 시나리오 집필은 호리이 유지 자신이 맡았고, 프로그래머겸 어시스트로는 동료인 나카무라 코우이치가 담당했다. 문제는 캐릭터와 배경 디자이너였다. 호리이 유지는 인연이 있던 <주간 소년점프>를 찾아가 추천을 요구했고, 여기서 [드래곤볼]로 유명한 토리야마 아키라와 손을 잡게 된다. 친근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토리야마 아키라 특유의 그림체는 호리이 유지가 생각한 ‘누구나 할 수 있는’ 게임 이미지에 잘 부합했다. 사운드 역시 <주간 소년점프>와 인연이 있던 스기야마 고이치가 맡았다. 스기야마 고이치는 훗날 일본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되는 인물이다. 호리이 유지, 나카무라 코우이치, 토리야마 아키라, 스기야마 고이치. 이 네 남자의 만남은 누가 뭐래도 환상적인 조합 그 자체였다.

최고의 정예 멤버가 모인 이 팀은 바로 새로운 게임 개발에 착수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용량 제한이었다. 당시 ‘패미컴’은 최대 64KB밖에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리이 유지는 어쩔 수 없이 글꼴부터 음악, 각종 게임 요소 등을 줄이고, 세이브/로드 기능도 패스워드로 대체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동원해 게임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게임성을 갖추는 것도 난관이었다. 호리이 유지는 [울티마]와 [위저드리]에서 영감을 받았던 만큼, 두 게임의 기본 설계와 무작위 전투를 결합해 뼈대를 세웠다. 대신 게임 내용은 심층적으로 구성하는 것보다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슈팅과 액션보다 플레이 시간을 길게 설정해 차별성을 두었다. 스토리는 악당이 훔쳐간 신물을 되찾기 위해 한 용자가 여정(모험)을 떠난다는 것으로 심플하게 잡았다. 물론 텍스트 집필에서는 호리이 유지가 다시 한 번 문장력을 발휘해 곳곳에 실소와 감동이 터져나올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전투는 턴 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전략성을 강조해 어려움을 주기보다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구성해 그 누구라도 게임에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그는 애초에 생각했던 <주간 소년점프> 연재도 빼놓지 않았다. 호리지 유지는 계획대로 <주간 소년점프>에 RPG에 대한 글을 썼고, 아울러 그가 제작 중인 게임에 대한 내용도 연재 식으로 내보냈다. 글솜씨가 워낙 뛰어났던 만큼, 독자들은 하나둘 그의 ‘새로운’ 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간 소년점프> 역시 독자들의 반응이 좋자, 그의 연재 글을 더 꼼꼼히 실어주면서 게임의 인지도까지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1986년. 일본 전역을 뒤흔든 RPG [드래곤퀘스트]가 탄생했다. 결과는 경이로웠다. 사람들은 토리야마 아키라가 제작한 이미지에 열광했고, 스기야마 고이치가 만든 음악에 또 한 번 열광했으며, 호리이 유지와 나카무라 코우이치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RPG라는 생소한 게임 내용에 다시 한 번 크게 열광했다. 결국, 이 게임은 첫 판매량만 150만 장을 돌파하며 ‘최고의 게임’으로 단번에 올라섰다. 동료의 힘과 [주간 소년점프]의 홍보효과가 크긴 했지만, 이 어마어마한 결과는 호리이 유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컸다. 감격스러운 순간이라 할만하다.

특히, 이 게임은 두 가지 의미에서 역사를 만들었다. 첫 번째는 일본에 RPG라는 장르가 처음 선보여진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그 장르가 JRPG(일본식RPG) 열풍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드래곤퀘스트]는 일본 게임산업에서 상징적인 작품이 됐으며, 수많은 아류작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만들었다. 바야흐로 JRPG 시대의 시작이었다.


▲ JRPG 시대를 알린 드래곤퀘스트

나에게 음악을 달라! 사카구치 히로노부

1962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어린 시절 음악광이었다. 얼마나 음악을 좋아했는지, 고교 시절에는 직접 밴드를 만들어 공연하러 다녔고, 그 스스로는 작사작곡에 보컬, 기타까지 만능으로 처리할 정도였다. 일본 최고의 뮤지션이 되는 것 외에 다른 꿈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공부는 당연히 뒷전에서 머물렀다.

이런 그가 인생의 첫 번째 변화를 맞이한 것은 대학시험에서 낙제된 이후였다. 그는 음악에 심취해 있어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떨어지고 보니 갑자기 장래가 어둡게 느껴졌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는 잠시 음악을 접고 학업에만 매진하기로 한다. 1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결국 다음 해 요코하마대학 전자 공학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번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을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순수한 노력형 스타일인 셈이다. 이렇게 대학에 입학한 그는 다시 음악을 손에 잡았다. 불안했던 자신의 미래에 슬쩍 빛이 보이니, 그는 더 부담 없이 밴드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며 뮤지션의 꿈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인생의 두 번째 변화를 맞이한다. 바로 컴퓨터였다. 음악밖에 몰랐던 그는 컴퓨터를 처음 접해본 이후 그 무한한 세계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충격이 컸던 그는 자신의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컴퓨터 정도는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그는 또 한 번 음악을 뒤로 한 채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했다. 한 번 하면 제대로 하는 그의 성격은 다시 빛을 발휘했고, 결국 독학으로 C언어나 베이직 등을 공부하며 실력을 쌓았다. 특별한 목표가 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환상에서 기인한 공부였다.

이후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방학 기간을 활용해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충분히 공부했으니, 관련 업무를 진행하면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마침 어떤 작은 회사에서 무려 1,500엔 시급을 주는 소프트웨어 개발 아르바이트를 모집하고 있었다. 80년대 일본의 평균 아르바이트 시급이 400~500엔 정도라는 걸 고려하면 꽤 파격적인 수치였다. 순수한 대학생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다른 조건보다 일단 시급이 많다는 것을 보고 회사를 찾아가 면접을 봤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회사가 거짓 광고를 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건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장면은 꽤 오래 기억되는 법이다.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게임 역사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바로 이 면접 자리가 아닐까 싶다. 당시 이 회사를 창립한 미야모토 마사시는 컴퓨터의 존재가 곧 일본을 바꿀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게임 소프트웨어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단 소프트웨어를 다룰 줄 아는 인재가 필요했는데, 이를 확보하기 위해 그는 1,500엔이라는 파격적인 시급을 걸고 인력 모집광고를 낸 것이다. 그러나 면접 자리에서 미야모토 마사시는 실제로 1,500엔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만든 게임이 팔리기만 하면 인센티브 등으로 충분히 1,500엔 정도의 시급을 받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괴상한’ 말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리둥절했고, 속았다는 생각에 바로 면접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바로 이 회사가 훗날 다양한 게임 소프트웨어를 만들며 일본 전역에 이름을 알린 스퀘어다.

순수한 대학생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미야모토 마사시의 말에 ‘속았다’는 것보다 ‘일리 있다’ 정도로 받아들였다. 정말 자신이 게임을 만들어서 그것이 팔리기만 하면 충분히 1,500엔의 시급을 받는 것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봐야 기본 시급은 비슷하니, 차라리 프로그래밍을 더 공부하고 이를 써먹을 수 있는 이 괴상한 회사가 훨씬 나아 보였다. 이렇게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계약직에 채용되기에 이른다. 만약 그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가 아는 [파이널판타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운명적 만남이라 할만하다.

그렇게 계약직 형태로 일하게 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바로 게임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선다. 그는 어린 시절 즐겼던 아케이드게임과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갖가지 게임을 떠올렸다. 막막했지만, 일단 뭐라도 만들어봐야 다음 진행이 수월해질 거 같았다. 그는 모니터 앞에서 손을 모은 채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뮤지션을 꿈꾸던 한 소년이 여러 사건을 통해 게임 개발자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곧 이 녀석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사카구치 히로노부

1등은 못 해도 2등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파이널판타지]의 탄생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먼저 어드벤처 장르를 생각했다. 독학으로 습득한 프로그래밍 실력을 고려해 난이도가 있는 슈팅이나 액션보다 어드벤처가 직접 만들기 수월하겠다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당시 인기 있던 [트랜실바니아]라는 게임을 기반으로 자신의 첫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몇 개월 뒤(1984년),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결국 어드벤처 게임 하나를 완성해낸다. 바로 [데스트랩]이다. 이 게임은 스퀘어를 통해 판매됐는데 약 3,000장 정도가 팔렸다. 안타깝게도 적자였다.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개발에 매진해 [데스트랩] 후속편을 내놓게 되는데, 다행히 이 게임은 적자를 면하면서 스퀘어에 신뢰를 주는 계기가 됐다 성과를 거둔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정직원으로 채용됐고, 아울러 개발팀 팀장으로 승진하기에 이른다. 팀장이라는 자리는 당시 스퀘어가 작은 회사였던 만큼 직급체계가 엉성하기도 했지만, 어떤 게임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완성해낼 수 있는 인내와 실력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재를 등용하고 팍팍 밀어준 스퀘어 역시 어느새 직원 수 100명을 거느린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퀘어는 얼마 가지 않아 지독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패미컴’ 용으로 나온 게임이 계속 실패를 거두면서 회사 사정이 급속도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팀장에 오른 사카구치 히로노부 역시 [킹스나이트] 등의 게임을 만들어 내놨지만 참패를 거듭하면서 회사 사정을 더 어렵게 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회사 사정과 별개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자신이 만든 게임이 실패를 거듭하자 자신감을 잃었다. 나는 게임개발에 소질이 없나 보다, 라며 처음으로 자책하게 된다. 결국,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냥 끝낼 수는 없었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 혼신의 게임 하나를 내놓고 싶었다. 그래야 속이 후련할 거 같았다.


▲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실패작, 킹스나이트 <출처: 네이버카페 구닥동>

이 과정에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게임 하나를 접하게 된다. 바로 1986년, 혜성처럼 등장해 일본을 마비시킨 국민 RPG [드래곤퀘스트]였다. 대체 이 게임은 무엇인가,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스스로를 채찍질할 정도로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본 이 게임은 충격적이었다. RPG라는 새로운 장르, [패미컴]에서 처음으로 본 놀라운 그래픽(당시에는 그랬다), 게다가 시나리오에 기반을 둔 잔잔한 감동과 여운까지. 이 게임은 사카구치 히로노부를 충격에 빠뜨림과 동시에 안 그대로 타오르던 열정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

충격에 빠진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바로 스퀘어 경영진을 찾아갔다. 그리고 딱 한 번만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게임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물론 배수의 진을 쳤다. 만약 그 게임이 실패하면 자신이 회사를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두둑한 배짱에 경영진은 그의 조건을 승낙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바로 RPG 개발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집중한 것은 감동이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그가 만든 게임이나, 스퀘어가 내놓은 게임 대부분은 감동이 없었다. 단순히 재미에만 초점을 둔 것이다. 게다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드래곤퀘스트]를 통해 게임이라는 미디어에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사쿠구치 히로노부의 음악적 감각과 게임적 감각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먼저 준비한 것은 RPG의 뼈대였다. 이에 그는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며 [드래곤퀘스트]는 물론, 그 모태가 됐던 [울티마]와 [위저드리]를 미친 듯이 플레이 했다. 그리고 이들 게임을 플레이하며 분석한 데이터는 꼼꼼히 수치로 기록해 자신이 준비 중인 게임에 녹여냈다. 게임이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각 캐릭터에 더 생명을 불어넣기로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꼼꼼한 시나리오 등이 뒷받침됐다. 아울러 국내에 [독수리오형제]와 [개구리소년 왕눈이] 등으로 친숙한 아마노 요시타카가 캐릭터와 배경 디자인을 전담해 특유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아마노 요시타카가를 잘 몰랐지만, 어떤 잡지에 공개된 그의 그림체를 보고 홀딱 반해 정중한 요청 끝에 인연을 맺게 됐다. 전투는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던 [드래곤퀘스트]와 달리 관찰자 시점으로 바꿔 캐릭터의 존재감을 더 드러냈다. 화면 중앙을 기준으로 양옆에 적 캐릭터와 아군 캐릭터가 세로로 배치되는 특이한 형태는 미식축구(NFL)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음악 역시 빠뜨릴 수 없었다. 다행히 이 게임의 음악은 훗날 전설적인 게임 음악가로 유명한 노부오 우에마츠가 담당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당시에 알지 못했지만 [드래곤퀘스트] 정예 멤버만큼이나, 그 역시 일본 최고의 거장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게임명은 [파이널판타지]로 확정했다. 원래 이 게임은 판타지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만큼, 게임명에 ‘판타지’라는 용어가 들어가는 것으로 회사와 합의했다.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이 게임이 안 되면 정말 게임과 연을 끊겠다고 다짐했던 걸 떠올리며 ‘파이널’이라는 단어를 합쳤다. 마지막 판타지. 이는 곧 그의 마지막 꿈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파이널판타지]는 1987년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파이널판타지]가 [드래곤퀘스트] 정도의 파급력을 보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누구보다 열정을 쏟아 부었던 만큼 최소 [드래곤퀘스트]의 뒤를 잇는, 말 그대로 ‘2등 게임’은 충분히 가능하리라 내다봤다. 시장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예상대로 [드래곤퀘스트]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부터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막상 게임을 해본 게이머들에게 서서히 호응을 얻었다. 아류작처럼 보이지만, 이건 분명히 [드래곤퀘스트]와 다른 맛이 있다. 이런 평가는 곧 입소문을 타게 됐고, 급기야 [파이널판타지]는 총 52만 장의 판매량을 거두게 된다. 정말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바람대로 일본의 ‘2등 게임’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스퀘어는 사카구치 히로노부에게 후속작 개발을 지시한다. 그때만 해도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만든 게임이 얼마나 위대한 작품으로 거듭날 것인지에 대해서.


▲ 위대한 역사의 시작! 파이널판타지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의 성장과 경쟁, 그리고 협업

때는 1988년 수요일. 당시 일본에서는 전날부터 몰려든 사람으로 인해 각종 전자상가와 편의점 앞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모인 목적은 명확했다. 바로 호리이 유지가 만든 게임 [드래곤퀘스트3]를 사기 위해서였다. 특히 히가시구치 앞은 장관이었다. 무려 1만 명이 몰렸다. 무리 중에는 게임을 사기 위해 평일 휴가를 낸 직장인도 있었고, 학교를 무단결석한 학생들도 있었다. 급기야 게임을 사지 못한 이들이 절도 사건을 벌이는 등 갖가지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목격된 기이한 사회현상이었다.

맞다. 호리이 유지가 창조한 [드래곤퀘스트]는 어느새 국민게임으로 성장해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드래곤퀘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뉴스로 해당 상황이 보도되니 게임의 인지도는 더 커졌다. 덕분에 [드래곤퀘스트]는 이후부터 발매된 모든 시리즈가 출시 전날 구름처럼 몰리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이런 아우성에 발매일 역시 평일이 아닌 주말에 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새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드래곤퀘스트] 시리즈가 인기를 끈 것은 단순히 이름값뿐만은 아니었다. 호리이 유지가 첫 타이틀을 발매한 이후, 계속 게임을 발전시키며 키워나갔기 때문이다. 특히 호리이 유지는 [드래곤퀘스트]를 개발함에 수평적 사고를 유지했다. 계속되는 시리즈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긴 하되, 세계관이나 설정 등은 고스란히 반영하는 정통성과 일관성을 고수한 것이다. 덕분에 [드래곤퀘스트]는 익숙함과 노스텔지어 사이에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러한 호리이 유지의 게임관은 [드래곤퀘스트3]에서 명확하게 묻어났다. 당시 호리이 유지는 [드래곤퀘스트]와 [드래곤퀘스트2]와 달리 아예 새로운 시리즈인 것처럼 게임 내용을 예고했는데, 막상 게임을 보니 거기에는 ‘대반전’이 들어가 있었다. 최종 보스로 알려진 녀석을 처치했는데, 그 이후 아무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보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대는 [드래곤퀘스트]와 [드래곤퀘스트2]의 주요 지역인 아레프갈드였다. 결국 보스를 무찌른 플레이어(용자)는 ‘로토’라는 칭호를 받는다. 게임을 해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에피소드. 바로 ‘로토’는 [드래곤퀘스트]와 [드래곤퀘스트2]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렸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결국, 플레이어는 잠시 과거로 돌아가 ‘로토’의 입장에서 플레이한 셈이다. 이런 연계성 있는 스토리의 힘은 [드래곤퀘스트]의 큰 매력이다.

확실히 호리이 유지는 게임 개발자이자 글 좀 쓰는 ‘게임 작가’로서 시나리오에 크게 집중했다. 특히 이 시리즈는 전체적인 플롯보다 에피소드식 이야기 전개에 더 집중했다. 즉, 내가 만나는 NPC, 내가 모험하는 마을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인터랙션이 발생하고, 이는 플레이어를 더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된다. 호리이 유지는 게임을 개발하면서 누구보다 인터랙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한 어떤 행동에 반응이 오는 것, 바로 이건 어른부터 아이까지 누구나 즐거워할 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체가 바로 [드래곤퀘스트]다.

또한, 호리이 유지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드래곤퀘스트]의 캐릭터와 전투 등을 마음속에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도 잘 수행했다. 그는 각종 잡지에 [드래곤퀘스트] 내용을 공개할 때마다 늘 토리야마 아키라가 그린 그림을 곁들였다. 해당 그림은 용자가 괴물과 싸우거나 매달려 있는 다소 역동적인 형태였다. 때문에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자연스레 그 광경을 떠올리게 되고, 환상에 젖어 전투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굉장히 단조로운 스타일의 전투 방식을 추구하는 [드래곤퀘스트]가 꾸준한 국민게임으로써 대성공을 거둔 ‘특별한’ 이유이기도 하다.


▲  4년 6개월 만에 등장해 인기를 끌었던 드래곤퀘스트8


▲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파이널판타지8

반면 [파이널판타지]를 창조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호리이 유지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특히 그는 누구보다 ‘진화’에 앞장섰다. 게임이 감동을 주는 미디어인 것을 확신한 그는, [드래곤퀘스트]의 아류작이 아니라 늘 진화하는 [파이널판타지]를 고집했다. [파이널판타지]가 [드래곤퀘스트]와 다른 부분에서 인기를 얻은 결정적 요인이다.

결과적으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수직적 사고 안에서 [파이널판타지]를 발전시켰다. 특정 패턴이나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개발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이나 하드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게임 내용도 [드래곤퀘스트]가 정통성을 지향했다면 [파이널판타지]는 변화를 촉구해 전작을 하지 않아도 금방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노력 끝에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파이널판타지3]를 기점으로 [드래곤퀘스트]와 어깨는 나란히 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둔다.

특히 이런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끝없는 노력은 [파이널판타지7(94)]이 등장하면서 온전히 응집됐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발매된 [파이널판타지7]은 최초로 3D(부분)를 도입해 게임의 볼륨을 어마어마하게 키워냈다. 게임성 역시 크게 발전한 상황이었다. 결국 [파이널판타지7]은 일본을 넘어, 최초의 RPG를 탄생시켰던 북미로도 수출됐다. 당시 북미의 RPG는 자유도 기반 게임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이 일본에서 넘어온 괴상한 RPG는 너무나 다른 매력이 넘쳐흘렀다.

자유도는 떨어졌지만 특징 있는 캐릭터가 있었고, 전투 방식은 신선했으며, 음악은 아름답고 무엇보다 게임 플레이에 감동이 있었다. 이런 감성 코드는 결국 북미 게이머들을 사로잡았고, 결국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드래곤퀘스트]가 JRPG의 시대를 열었다면, [파이널판타지]는 그 JRPG를 북미에 안착시켜 글로벌 장르로 키워낸 셈이다. 이를 기반으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미야모토 시게루, 스즈키 유와 함께 인터랙티브아츠 앤드 사이언스 학회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일본인 게임 개발자로 우뚝 서게 됐다.

다소 명암이 엇갈리긴 했지만, 두 남자는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를 만든 이후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흥미로운 것은, 두 남자가 정말 괴리하리만치 각자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만약 두 게임이 무리한 경쟁 끝에 독이 올라 마구잡이로 시스템을 설계했다면 아마 지금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두 작품은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거기에 집중함으로써 지금도 게이머들 추억 한 켠에 자리 잡을 ‘명작’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참고로 2013년 현재, [드래곤퀘스트]의 시리즈 누적 판매량은 6,000만 장, [파이널판타지]는 1억 장을 돌파했다.

그리고 1995년. 게이머들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한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에닉스와 스퀘어가 합작한 게임이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는 사카구치 히로노부였고, 시나리오는 호리이 유지가 각각 담당했다. 둘의 만남은 일본 게임산업의 최고 이슈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는 곧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가 만나는 것과 같은 상징적 의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축구로 치면 호날두와 메시가, 국내 프로야구로 치면 선동열과 최동원이 같은 팀이 된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크로노트리거]는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길이 남을 명작 중 하나로 남게 됐다. 결국, 이 게임은 두 남자가 팬들에게 안긴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다.


▲ 호리이 유지와 사카구치 히로노부 외 정예멤버가 모여 만든 크로노트리거


▲ 호리이 유지가 빠지긴 했지만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만든 블루드래곤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호리이 유지와 사카구치 히로노부가 남긴 것들

호리이 유지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를 개발했지만, 단순히 게임 개발자로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만큼 두 게임은 일본은 물론 세계 곳곳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게임을 통한 부차적 문화의 확산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드래곤퀘스트]는 게임 자체도 인기가 있었지만, 이를 기반으로 한 여러 부차적 콘텐츠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주간 소년점프>와 인연이 컸던 만큼, [드래곤퀘스트]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만화책이 무수히 등장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타이의대모험]이나 [로토의문장] [아벨탐험대] 등이 이에 속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다.

만화뿐만 아니라 [파이널판타지]는 급기야 영화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파이널판타지7]이 북미에서 큰 인기를 누린 만큼, 이를 기반으로 한 영화 제작이 진행된 것이다.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했던 만큼,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는 실패로 끝났다(물론 해당 영화의 실패로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스퀘어를 떠난다). 다만 게임이 영화로 등장한 큼직한 사건은 지금도 ‘문화 콘텐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 드래곤퀘스트 기반의 만화책 타이의대모험(좌)과 영화 파이널판타지(우)

또한,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는 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캐릭터가 많다. 덕분에 일본에서는 관련 캐릭터 사업이 발전하기도 했다. 특히 [파이널판타지]의 레노, 라디아, 티파, 유우나, 케프카, 클라우드, 세피로스 등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릭터다. 때문에 각종 게임 관련 페스티벌에 가면 여전히 코스프레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 벗을 수록 방어력이 강력해진다는 속설의 ‘비키니 아머’는 [드래곤퀘스트]의 여전사가 그 시초가 됐다. 물론 여기에 [드래곤퀘스트]의 슬라임과 [파이널판타지]의 초코보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기 캐릭터다.

두 번째는 콘솔게임의 발전과 일본 게임기업의 가치 상승이다. 놀라운 말로 들리겠지만,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파이널판타지]와 [드래곤퀘스트]의 영향이 컸다. 1994년 당시 소니는 세가세턴과 신규 가정용게임기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국민게임으로 칭송받던 [파이널판타지]가 플레이스테이션을 선택함으로써 확실한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다.

이후 [드래곤퀘스트]까지 플레이스테이션을 선택함으로써 세가세턴은 결국 사업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두 타이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만약 두 타이틀이, 아니 하나의 타이틀 만이라도 세가 세턴을 선택했다면 아마 지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조금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플레이스테이션은 해당 계기로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최고의 게임기기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서두부터 꾸준하게 강조했던 JRPG의 탄생이다. 두 게임의 탄생으로 이에 뼈대를 둔 유명한 JRPG가 여러 형태로 확산해 발전됐다. 게이머 층을 끝없이 늘었고, 일본 시장 전체를 키운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JRPG는 일본에서만 인기를 끈 것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쳤다. 만약 두 게임이 없었다면, 우리는 [창세기전] 등의 토종 RPG를 플레이하며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두 남자는 게임을 만든 게 아니라 문화를 만들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손에서 탄생한 문화였다.




▲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를 대표하는 캐릭터

게임으로 감동을 느끼는 것

최근 호리이 유지와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근황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호리이 유지는 저술가 및 [드래곤퀘스트] 개발 감정 등을 하고 있고,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직접 차린 미스트워커에서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파이널판타지7] 실사 영화 제작에 대한 크라우드 펀딩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서두에도 언급했듯,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RPG 몇 종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오래 기억될 만큼 감동과 여운이 깔린 게임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호리이 유지와 사카구치 히로노부는 바로 그 감정의 덩어리를 우리에게 선사한 시초 격이라 할만하다. 이 둘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PC 하드 한쪽 구석에 봉인해둔 혹은 보관함에 담아둔 게임 타이틀이 문득 떠오른다. 바로 이런 감정을 남긴 것이 두 남자의 최고 업적이 아닐까 싶다. 이들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가끔 꿈에 나올 거 같은 슬라임과 초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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