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있다. 그는 친구의 추천으로 ‘리니지’를 시작했다. 힘겹게 말하는 섬을 빠져나와 은기사 마을에서 고블린을 잡던 중, 붉은색 아이디의 어떤 이에게 이유 없이 맞아 죽었다. 그는 차디찬 땅에 나자빠진 사실보다 문제의 PK 플레이어가 내뱉은 말에 더 충격을 받았다. “억울하면 강해져라” 그는 순간 마우스를 힘주어 쥐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요동치는 느낌에 사로잡힌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리니지’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돼 있었고 세월도 10년이나 흘렀다. 친구나 학교 동기들보다 ‘리니지’의 혈맹원을 만나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게 더 즐거웠다. 이미 그에게 ‘리니지’는 삶의 일부였다.
엔씨소프트의 ‘리니지’가 서비스 12주년을 맞이했다. 한 해가 바뀌었으니 년차로 치면 이제 13주년이 되는 셈이다. 국내 온라인 게임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확실히 12란 숫자는 그 의미가 크다. 역사의 한 축을 이끌었다고 감히 표현해도 될 정도다. 지난 07년에는 국내 문화콘텐츠 상품 최초로 누적 매출 1조 원을 달성했고, 지금도 국내 온라인 게임 인기순위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며 엔씨소프트의 효자게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처럼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며 장수하고 있으니 ‘대단한 게임’이란 말에 쉬이 부정하기 힘들다. 한때 현금거래나 작업장 등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수식어로 여러 차례 홍역을 치룬 바 있으나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됐다. 여전히 ‘리니지’는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
▲ 리니지 11주년 기념 월페이퍼
리니지는 왜 떴나?
오래 전, 학창시절의 기자는 잠깐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사장이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여긴 리니지 손님들이 대부분이야. 그 분들에게는 특별대우 해드려야 한다. 알겠지?” 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특별대우’란 표현까지 쓰나 싶었는데 이유는 있었다. PC방 전체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 그 ‘특별한 손님’들은 한번 오면 몇 시간이고 앉아 ‘리니지’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나이는 20~30대에서 40~50대까지 다양했고, 늘 삼삼오오 모인 채로 떠들썩하게 플레이했다.
일화 하나가 더 있다. 그 ‘특별한 손님’ 중 한 명이 기자에게 “리니지 할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신의 캐릭터로 사냥 한번 해보라고. 머쓱하게 앉아 마우스를 굴리는데 어느새 몰려온 일당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이거이거, 리니지하는 자세가 안 됐구만” 한 명이 비켜보라며 몸소 ‘리니지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 설명했다. 항상 오른손은 마우스에, 왼손은 45도 비틀어 키보드 윗부분에 올려두라고. 언제 위급한 상황이 닥쳐올지 모르니 빠르게 대응해주는 것이 ‘리니지’에서 가장 중요하니 명심하라고. 그의 특별강연에 기자는 자연스레 “넵”이라 대답했고, 이후 이들과 친해져 잠시 ‘리니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리니지의 올바른 자세, 엉? 확실해? 이게 최선이야?
‘리니지’의 재미요소는 위의 일화에서 다 찾을 수 있다. 우선 접근성이다. ‘리니지’는 쉽고 단순한 게임이다. 전투는 한대 쥐어박고 한대 얻어맞는 단순한 패턴으로 진행되며, 체력이 소모되면 물약 먹고 사냥을 통해 얻은 돈으로는 다시 물약을 사거나 아이템을 맞춘다. 이렇게 방식이 단순하니 게임 문외한이라도 한번만 해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덕분에 ‘리니지’는 20대뿐만 아니라 40~50대 중년층에게도 인기가 높다. 나이와 관계없이 ‘리니지’라는 ‘게임’을 두고 서로가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었던 셈. 요즘 출시되는 신작 MMO 가운데 이처럼 다양한 연령층이 한데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게임이 있었던가? 이건 게임 본연의 의미를 잘 갖춘 ‘리니지’의 고유한 힘이다.
두 번째는 MMORPG의 대중화다. 온라인 게임을 처음 접해본 국내 유저들은 신세계를 만난 마냥 호기심과 더불어 더 재밌게 플레이를 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함께 한다는 것 자체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접근성도 높으니 서비스 15개월 만에 회원수 100만 명을 달성했고, 국내 온라인 게임 최초로 동접 10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리니지 하세요?”란 물음에 “그렇다”고 해주면 10년 된 벗처럼 친근해질 정도다.
세 번째는 혈맹 커뮤니티다. ‘리니지’의 가장 큰 재미요소는 공성전을 비롯한 PvP다. 그리고 이를 즐기기 위해서는 함께 할 수 있는 동료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를 충족시켜주는 콘텐츠가 바로 혈맹이다. 공성전은 ‘리니지’ 월드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확연하게 분리해 줌으로써 모든 유저들에게 더 큰 목표와 야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덕분에 혈맹이 굉장히 활성화됐다. 같은 혈맹원이라면 가족보다 더 꼼꼼히 챙겨주는 탓에 서로 간 커뮤니티는 더 끈끈해졌다. 최신 게임들처럼 길드 업적이니 혜택이니 지원해주는 것 하나 없었지만 단순 ‘목표’ 하나를 두고 공동체의 의미가 확실하게 살아난 셈이다. 역시 ‘리니지’의 힘이다.
▲ 리니지의 공성전을 패러디한 '국회 온라인 공성전'
네 번째는 아이템의 가치다. 각 아이템의 성능은 공격과 방어의 절대 공식이 디테일하게 설계돼 있어 좋은 것으로 갈아치울 때마다 변하는 게 눈에 쏙쏙 들어온다. 덕분에 아이템은 ‘리니지’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 콘텐츠가 됐다. 존재 자체만으로 유저들에게 ‘강해지고 싶은 욕구’를 심어주는 셈. 강화 시스템도 밸런스가 정교해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의 아찔한 스릴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재미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유저와 유저가 만들어내는 커뮤니티 콘텐츠다. 시스템 적으로 무엇을 해라 굳이 지원하지 않아도 유저들이 알아서 콘텐츠를 창조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냥터를 특정 혈맹이 ‘우리 땅’이라고 우기면 일반 유저들은 머쓱히 물러나야 한다. 암묵적 룰이기 때문이다. 혹여나 누군가가 이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혈맹원에게 신고하면 “없애버려야지!”란 구호와 함께 혈맹 간 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일반 유저를 죽여 아이템을 빼앗아 먹는 PK가 한때 기승을 부리기도 했는데, 몇몇 정의로운 유저들은 직접 사냥꾼 집단을 꾸려 이들을 사냥하러 다니기도 했다. 시스템 적으로 지원하는 룰 따위는 없다. 그냥 이 자체가 재밌는 거고, 그래서 ‘리니지’를 하는 거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는 ‘리니지’의 가상세계가 시스템 적으로 바탕만 마련해 둔 채 별도의 제한이나 룰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 안에 경제체제 또한 우수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영주가 되는 것을 목표로 생활을 하면서, 돕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기도 치고 누군가를 이유 없이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커뮤니티 콘텐츠가 자연스레 발생한다. 12년이란 기간 동안 ‘리니지’가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물론 이러한 ‘리니지’의 장점이자 재미요소는 반대로 단점이 되기도 했다. 남들보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에 가상세계가 아닌 리얼세계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아이템의 가치가 워낙 높으니 현금거래를 목적으로 플레이하는 이들도 점차 늘어났다. 게임이 점차 하드코어해지는 것도 문제였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는 엔씨소프트 측도 잘 알고 있었다.
▲ 리니지의 꽃 '공성전' 구경꾼도 상당한데, 자칫하면 사망한다
그때 그 시절의 ‘리니지’가 아니다
지금의 ‘리니지’는 예전의 ‘리니지’와 많이 다르다. 12년 서비스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업데이트로 크고 작은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대략적인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원초적 재미요소는 해치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우선 ‘리니지’는 신규 클래스 용기사와 환술사를 지난 08년에 추가했다. 다크엘프 이후 5년 만에 일이다. 클래스-아이템의 밸런스가 완벽에 가까운 상황에서 새로운 클래스의 등장은 사실 리스크가 크다. 전략을 요구하는 장르가 아니더라도 ‘리니지’의 가장 큰 재미요소가 공성전과 PvP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하다. 때문에 두 클래스의 등장은 언제든 밸런스는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는 엔씨소프트의 자신감과 새로운 클래스가 앞으로도 추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저들에게 시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작년에 추가된 레이드 시스템과 파티형 인던은 특별히 눈여겨 볼만하다. 유저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재미요소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리니지’ 유저들은 그들만의 단절된 세계에서 신작 게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레이드니 파티 던전이니 하는 부분은 먼 나라 이야기지만 이렇게 시스템 적으로 제공해주니 간접적으로나마 해당 콘텐츠를 접해볼 수 있게 됐다. 물론 최근 게임의 모양새를 갖추기에는 비주얼이나 시스템 적으로 제약이 따르겠지만 ‘리니지’만의 색깔을 바탕으로 한다면 확장성도 충분히 기대해볼만 하다.
▲ 위엄이 느껴지는 드래곤 '안타라스'
오래된 게임의 고질병인 하드코어함을 씻어내기 위한 노력도 엿보인다. 우선 ‘편리성’을 지향하는 UI 개선이 이루어졌고, 휴식 경험치 개념을 도입해 게임을 쉰만큼 추가 경험치를 얻도록 하는 시스템도 도입했다. ‘전투 특화’ 혹은 ‘라이트 유저 특화’라는 식의 ‘특징’있는 서버까지 꾸준히 오픈하고 있어 유저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고레벨 유저들을 위한 ‘기란 감옥’이 업데이트 됐고, 추가 경험치 혜택까지 부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리니지’의 부정적 인식을 씻어내려는 노력이다. 엔씨소프트는 지금까지 현금거래 근절과 오토마우스를 이용한 작업장 등을 배척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시도로 노력해왔다. 그 결과, 어느 정도 개선은 이루어졌지만 깔끔하게 해결되진 못했다. 원천을 완전히 봉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게임을 뿌리부터 지탱하고 있는 경제 시스템을 다시 설계할 리도 만무하다. 그래서 엔씨소프트가 고심 끝에 꺼낸 카드가 바로 ‘N서비스’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몇 년 간 ‘리니지’에 주기적으로 부분 유료화 이벤트를 진행한 바 있다. 외부 시선은 따끔했지만 내부 상황은 정반대였다. 유저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던 것. 실제로 유저들은 이벤트에 적극 참여했음은 물론 더 다양한 형태로 진행해주길 요구하기도 했다. 몇 년 동안 이를 분석한 엔씨소프트는 결국 아이템을 상시 판매하는 형태의 ‘N샵’을 오픈했고, 마일리지 혜택인 ‘N라운지’까지 추가 오픈했다. 추진 배경을 “게임을 더 즐겁게 즐기기 위한 방법”이라 말할 수 있었던 까닭도 유저들의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N서비스’ 도입이 현금거래나 작업장 해소 문제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단 엔씨소프트 뿐만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도 인식도 변화해야만 온전히 해결될 수 있다. 합법거래의 장을 통해 불법거래 행위를 차차 줄여나가고, 이를 통해 유저들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하면 분명 ‘리니지’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 분명하다. 아울러 엔씨소프트의 운영 능력 여하에 따라 “수익창출에 눈이 멀었다”는 외부의 부정적인 시각도 완전히 뒤바꿀 수 있으리라고 본다. 결국 시간문제다.
▲ 얼마 전 서비스를 시작한 'N서비스'
현재는 미래가 창조 한다
“현재는 미래가 창조한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재해석하듯, 분명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에 의해 재해석될 것이다. 그래서 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의 말이다.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에 부정하며 위와 같이 말했다. 의미는 어렵지 않다. 과거의 나의 모습은 지금 내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내가 지금 거지라면 과거의 나는 A로 해석될 것이고, 유명인사라면 또 다른 B로 해석될 것이다. 때문에 현재는 미래가 창조한다는 의미다.
난 이 말이 ‘리니지’에도 통용되리라 믿는다. 12년간 수많은 업적을 남긴 ‘리니지’였지만, 현재 서비스가 중단된 상황이라면 분명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게임’으로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으니 ‘과거를 풍미해 지금도 인기 있는 게임’이란 추가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지금 이 시점에서 ‘리니지’를 짚어보는 이유가 의미 있는 까닭이다.
엔씨소프트는 ‘리니지’의 슬로건을 ‘Never-Ending Change’로 잡아 앞으로도 계속 변화하겠다고 밝혔다. 신뢰가 가는 이유는 지난 12년간 변화한 ‘리니지’가 지금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리니지’는 국내 온라인 게임 역사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어딘가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누구도 ‘리니지’의 아이덴티티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온전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될 것 같다. 지금의 ‘리니지’는 미래의 모습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 재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모이면 모일 수록 더 즐거운 '리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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