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카드사가 스팀 성인게임을 심의하게 되었나?

16일, PC게임 플랫폼 스팀이 성인 콘텐츠 가이드라인을 업데이트하며 결제 대행사 기준에 위반되는 콘텐츠를 제한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게이머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규제 단체도 아니고, 국가 기관도 아니고, 게임사도 아니고, 한낱 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업체에서 스팀이라는 플랫폼을 규제한다니?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다소 복잡하다. 온라인 콘텐츠 업계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결제 규제 흐름의 일환인데, 그 배경에는 복잡한 법적, 사회적, 그리고 금융적 요인이 얽혀 있다.

결제 규제의 주요 발단으로는 2022년 미국에서 발생한 한 소송이 꼽힌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한 13세 소녀가 온리팬스(OnlyFans)라는 성인물 기반 사이트에 자신의 영상이 무단으로 업로드되었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해당 사이트가 다수의 성 학대 자료 등 불법 영상을 인지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서 비자(Visa)와 마스터카드(MasterCard) 등 주요 신용카드사들도 피고에 포함되었다. 자사의 네트워크가 이러한 불법 콘텐츠 결제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법 수익 흐름을 묵인했다는 주장이다. 해당 소송은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이를 계기로 신용카드사들이 성인 콘텐츠 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카드사들의 이러한 조치는 현재 소송 중인 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줄이기 위한 행위라는 분석이다. 한 내부 고발자는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2021년~2022년 연방 수사관들의 온리팬스 내 아동 성 착취물 존재 경고를 비롯해, 2022년 반인신매매 단체의 연구 결과 공유 등을 통해 해당 사실을 인지하고도 묵인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두 카드사는 해당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으며, 불법 활동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카드사가 영상이나 만화, 게임 등 콘텐츠 플랫폼에 대한 단속을 벌이고, 결제를 차단하기 시작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시작된 규제 흐름은 태평양을 넘어 작년부터 일본 콘텐츠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4년 4월에는 대형 다운로드 사이트 'DLsite'에서 신용카드 결제가 중단되었고, 6월에는 대형 성인 동인지 사이트 'FANZA 동인'에서 비자카드 결제가 막혔다. 11월에는 절판 만화 복각 사이트 '만화 도서관 Z'가 결제 서비스 거래 중단으로 일시적인 사이트 폐쇄라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 외에도 '포켓 드라마 CD', 'pictSPACE', '아에르네' 등 남성향과 여성향을 불문하고 다양한 콘텐츠 플랫폼에서 카드 결제가 중단되는 현상이 잇따르고 있다.

비자 본사는 자신들이 합법적인 콘텐츠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신용카드사의 압박을 받은 '결제 대행사'가 이러한 규제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신용카드 브랜드와 가맹점 사이에 끼어 있는 결제 대행사들이 카드사들의 압력을 받아 자체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특정 콘텐츠에 대한 결제를 중단시키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하우지 대학교(Dalhousie University)의 발 웨버(Val Webber)가 2022년 발표한 논문 '마스터카드의 성인 콘텐츠 정책이 성인 콘텐츠 제작자에게 미치는 영향(The Impact of Mastercard's Adult Content Policy on Adult Content Creators)'에 따르면, 마스터카드의 개정된 성인 콘텐츠 판매자 가이드라인은 플랫폼에 추가적인 규제 요건을 부과했다. 콘텐츠 제작자가 동의서를 보관하는 것을 넘어, 플랫폼이 직접 출연자의 동의 및 신분증을 확보하고 연령 및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 검증된 콘텐츠 제공자만 업로드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모든 콘텐츠는 게시 전 사전 검토를 거쳐야 하며, 라이브 스트리밍을 지원할 경우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잠재적으로 불법적이거나 마스터카드 기준에 위배되는' 콘텐츠에 대해 사용자가 신고하고 출연자가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하고, 월별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또한 아동 성 착취물(CSAM)이나 비합의적 활동을 암시하는 키워드 사용을 금지하고, 인신매매나 성매매 조장 방지 정책을 마련하도록 했다. 여기에 마스터카드가 요청할 경우 특정 콘텐츠를 제한해야 한다는 조항도 포함되었다.

여기에 2022년 진행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0%가 이 정책으로 인해 계정 정지/폐쇄, 신분증 업데이트 요구, 테마 또는 문서 규칙 위반으로 인한 콘텐츠 삭제, 검토를 위한 재업로드 지연, 결제 중단, 판매자 계정 폐쇄 등 최소 한 가지 이상의 피해를 겪었다고 보고했다. 특히 페티시, BDSM, 퀴어 콘텐츠 등의 제작자들은 테마 규제 위반으로 인해 콘텐츠가 삭제될 가능성이 1.4~1.5배 높았으며, 일반적인 성적 취향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콘텐츠가 삭제되는 경향이 높다고 밝혔다. 이는 카드사가 성인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자의적인 기준에 의한 차별과 검열, 비주류적인 성적 취향 규제를 진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팀이 최근 가이드라인을 업데이트한 것에는 이러한 결제 대행사 및 카드 네트워크, 은행, 인터넷 제공업체들이 정한 규칙과 기준에 저촉될 수 있는 성인 콘텐츠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스팀의 주 수익원은 일반 게임이지만, 성인용 콘텐츠도 일부 취급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체 플랫폼에 신용카드 사용이 금지된다면 크나큰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운영사인 밸브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성인 콘텐츠 검열 권한을 카드사나 결제 대행사에 줄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다만 온라인 카드 사용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카드사가 국가 규제 기관이나 심의 단체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는 것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검열 기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나 명백한 기준이 제시되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콘텐츠 제작자나 일반 소비자들의 의견이 광범위하게 반영되는지도 미지수다.

현재 스팀에는 다양한 성인용 게임이 존재한다. 특히 일본이나 대만 쪽에서 출시되는 2D 성인용 게임 중에는 '로리' 콘셉트의 어린 외형이나 교복을 입은 학생 캐릭터가 등장함에도 '설정상 성인입니다'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 앞서 언급한 소수 취향 테마를 반영한 게임도 다수 존재한다. 스팀에 적용되는 카드사와 결제 대행사의 규제 규정이 앞서 성인물 플랫폼과 같은 수준이라면, 상당수 게임이 스팀에서 판매를 종료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 밸브 측은 향후 추가될 자세한 규제 기준에 대해 밝히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상당수 게임이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팀 외 플랫폼들도 같은 규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콘솔 3사의 플랫폼이나 에픽게임즈 스토어 등은 스팀에 비해 성인용 콘텐츠 비율이나 수위가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큰 영향이 없겠지만, 일부 인디게임 플랫폼 등은 이와 비슷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이나 대만, 유럽 등지에서 서비스 중인 성인게임 전용 플랫폼들도 대상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