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대의 비극 2차 세계대전. 죽음의 무게가 워낙 커서인지 곱씹고 곱씹어도 비극의 잔재는 그대로다. 아이러니 하게도 디지털문화의 한가운데 있는 지금, 이 엄청난 비극은 과거의 로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로망은 또 하나의 판타지를 빗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전쟁의 슬픔을 현실의 재미로 버무려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아버지들이 흘린 눈물은, 사정없이 패드를 누르며 고함치는 신세대들의 카타르시스로 맞바꾸어졌다. 지금도 게임기속 가상세계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번의 전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을 완벽하게 재연해 팬들과 평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콜 오브 듀티(이하 COD)가 시리즈 3번째 이야기를 내놓았다. 아니 그동안 출시된 확장팩까지 다 아우른다면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를 만큼 많이 나왔다. 2차 대전을 너무 우려먹는다는 비난 속에서, 이번에 출시된 COD3은 확실한 ‘적통’임을 입증해야 했다.
■ 전쟁의 스케일을 줄이고, 디테일을 살리다
COD 시리즈는 ‘메달 오브 아너’ 시리즈와 함께 전쟁FPS의 ‘양대산맥’으로 통한다. 맨손으로 스탈린그라드를 달릴 때, 그 압도적인 스케일과 디테일한 전장묘사는 당대 최고의 전쟁게임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FPS게임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면서 COD도 변화와 혁신이 필요했다. 그 변화의 실험대 위에 서있는 작품이 이번 3편이다. 변화의 핵심은 이렇다. 지금까지의 트레이드마크인 스케일을 줄이고, 디테일을 살렸다. 이것은 COD시리즈의 ‘또 다른 모험’이자 ‘필연적인 선택’으로 평가된다.
COD3의 무대는 프랑스다. 과거 소련, 아프리카, 북유럽 등 모든 전선을 망라했던 스케일에 비해 프랑스 한 곳에만 포커스를 맞췄다. 오마하해변 상륙작전, 발지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전작의 대규모 전투씬에 비하면 “고작”이란 소리가 나올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큰 전투보다 지협 적인 시가전 및 소규모 고지탈환 전투로 일관한다. 전작의 스케일을 원했다면 화장실 갔다 그냥 나온 사람처럼 허전한 느낌마저 들것이다. 이정도 되면 COD시리즈의 퇴보까지 논하는 유저들도 있을 법하다.
“아니 삼돌이(XBOX360)라는 괴물머신으로 출시되면서도 달랑 프랑스만 다루다니 실망이군.”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변화를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 보면 된다. 엑티비전 개발자들은 얄미울 정도로 머리가 좋다. 진부해져가는 자신의 게임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모험을 하기보다 그동안 소홀했던 부분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디테일이다. 그들은 전장의 스케일에 초점이 맞춰져 상대적으로 소외받았던 전장속의 숨은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췄다.
무대는 프랑스로 한정되었지만 그 안의 스토리는 이제껏 출시된 시리즈 중 가장 짜임새 있다. 유저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를 수복하기 위해 속속 모여든 연합군의 일원이 된다. 미국, 폴란드, 영국 등 프랑스 수복에 나선 국가는 각자가 맡은 임무에 따라 다양한 작전을 펼쳐진다. 우선 이야기의 구성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가 미국 미션을 하고 있다면 이벤트 신을 통해 옆에 지나가고 있는 노르웨이 군을 보며 농담을 하는 상황을 보게 된다.
미군미션을 클리어 하면 이번엔 옆에 지나쳐갔던 노르웨이군의 시점으로 되돌아가 그들이 수행했던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듯 동일한 전장을 다양한 시점으로 살펴보면서 전투의 세밀한 점까지 체험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고지를 사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후퇴하는 독일군을 토벌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투를 틈타 아군포로들을 구출하는 미션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된다. 게임의 리얼리티도 탁월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전우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신들을 보고 오열하는 동료들의 표정까지 그대로 새겨 넣었다.
스토리 라인도 강화됐다. 영웅적인 희생은 물론이고 다른 부대와의 마찰과 협동, 상하간의 갈등 등 2차 대전당시 다국적군들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군대를 갔다 온 대한민국 남자라면 한번씩 공감할법한 이야기다. 여기에 간간히 터지는 전쟁용(?) 농담들도 게임의 리얼리티를 살린다.
■ 전쟁, 그 이면의 모습까지…
Xbox360이라는 괴물을 만난 탓에 그래픽은 가히 최고다. 연막탄을 터뜨릴 때 나는 연기의 질감은 전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심지어는 총구에서 나는 연기로 인해 그 주변이 어른거리는 이른바 ‘아지랑이 효과’까지 섬세히 표현했다. 여기에 전작보다 더욱 다양한 액션이 추가됐다.
전작의 경우 폭탄을 설치할 때 버튼 하나만 누르고 있으면 되었지만, COD3의 경우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뇌관을 심고, 안전핀을 뽑는 일련의 동작들을 모두 소화해야 한다. 또한 쌍안경을 이용해 포격할 위치를 지정해 주면 후방의 지원사격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COD3를 더욱 실감나게 만든 것은 육박전이다. 육박전은 이벤트성 전투로써 커맨드 입력방식으로 진행이 된다. 이러한 육박전의 등장으로 영화에서나 보았던 치열한 백병전의 느낌을 몸소 체험해 볼 수 있다.
격렬한 전장묘사는 더욱 업그레이드됐다. 이미 달인의 경지에 오른 연출력은 3편에 와서 ‘만개’한 듯한 느낌이다. 엄청나게 밀려드는 독일군의 공세에 “이제는 끝이다”고 절망하는 순간, 아군 폭격기를 선두로 지원군이 밀려드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웅장한 사운드 효과는 사실적인 연출력에 날개를 달아준다. 총소리, 비명소리,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그대로 연출한다.
게임의 인공지능 역시 진일보했다. 플레이어가 접근하면 뒤로 후퇴하기도 하며, 엄폐물에 숨어있을 때는 머리만 살짝 내밀었다가 다시 숨는 속임수까지 쓴다. 적군이 수류탄을 투척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엄폐물에 숨어만 있다가는 전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십상이다. 가장 쉬운 난이도로 플레이해도 죽어나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챕터마다 다양한 미션이 제공된다. 인질구출, 고지점령, 탱크전, 거점방어 등 다양한 형태의 미션이 적재적소에 주어진다. 때문에 단조롭거나 지루할 틈이 없다. 탱크나 지프 등의 탈거리도 풍부하다.
■ COD가 추구하고자 하는 전쟁은…
한글화도 깔끔한 수준이다. 양키센스가 녹아있는 군대식 유머들도 자연스럽게 해석해 놓았다. 굳이 단점을 찾으라면 텍스트 정렬이 안됐다는 점. 때문에 글자가 화면을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물론 대형 와이드 TV로 플레이한다면 이런 불편은 없지만 필자의 모니터는 불행이도 24인치 볼록TV다. 척박한 콘솔시장에서 한글화를 해준 것 하나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일이지만 이왕 한글화를 했다면 소소한 부분까지 완벽을 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차후 등장할 COD4는 걸프전이 배경이라 한다. 드디어 현대전으로 그 전장을 옮긴 것이다. 확장팩이 계속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2차대전의 포화는 이번 작품으로 마지막이다. 하지만 2차대전이든, 현대전이든 최고의 ‘전쟁게임’을 내놓을 것이란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게임 속에서 한 병사는 “전쟁을 하는 자는 정치인이지 군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정치인이 아닌 병사들의 전쟁,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전쟁, 이것이 COD 시리즈가 그렇게 추구하고자 하는 전쟁의 모습이 아닐까? 엔딩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금, 게임이 펼쳐놓을 새로운 전장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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