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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로냐프 강'처럼... 이상균 PD의 '뻔하지 않은 신작'

90년대 판타지 소설을 즐겨봤다면 ‘하얀 로냐프 강’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 장르문학의 손꼽히는 명작으로, 기사 ‘퀴트린’과 음유시인 ‘아아젠’ 그리고 뭇 영웅과 현자가 엮어가는 장대한 서사시는 수많은 독자의 눈물샘을 자극한 바 있다. 특이하게도 작가 이상균은 이 작품 이후로 더는 장편을 집필하지 않았는데, 지난 12년간 소설가가 아닌 게임 개발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상균 PD의 대표작은 그 유명한 ‘마비노기 영웅전’이다. 소설가라는 전력 때문에 시나리오 라이터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액션 설계와 콘텐츠 디자인 등 기획 전반을 총괄하는 팀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즌 1 ‘박제된 낙원’을 완성한 그는 2012년 블루홀에 합류해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오는 20일(수), 출시되는 모바일 전략게임 ‘엑스 에이전시’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 '하얀 로냐프 강' 작가이자 12년자 베테랑 개발자 이상균 PD 

보드게임+술래잡기+가위바위보+현대 능력자물 = ‘엑스 에이전시’

“’엑스 에이전시’는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독특한 방식의 게임입니다. 보드 게임판 위에서 실시간으로 술래잡기를 하며, 전투는 심리전이 가미된 가위바위보로 치러진다고 상상해보시길. 게임판에 놓인 각양각색의 건물에서 ‘조사’를 통해 각종 아이템을 얻고 이를 활용해 경쟁자를 무찔러야 합니다. 여기에 다양한 특성과 승리조건을 지닌 게임판을 여러 개 준비하고, 캐릭터도 저마다 개성적인 시나리오를 부여해 콘텐츠를 확장했죠”

판교에서 만난 블루홀 이상균 PD는 “더 재미있는 것보다는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고 포부를 밝혔다. 상용게임은 시장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새로운 것을 향한 그의 고집과 창의적인 스튜디오를 유치하려는 회사의 바람이 맞아떨어져 과감한 도전이 가능했다. 판타지풍 RPG가 대세로 자리매김한 국내에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숨바꼭질 형식을 차용한 능력자물이 나온 것이다.


▲ 술래잡기와 가위바위보가 조합된 독특한 게임 '엑스 에이전시 (사전예약 페이지)' 

“게임의 무대는 우리 세계와 비슷하지만 ‘섀도우’라는 연기 형태의 마물이 뒤섞여 살아가는 평행우주입니다. ‘섀도우’는 다양한 동식물을 잡아먹으며 점차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는데, 급기야 더욱 고등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식인을 저지르죠. 유저 여러분은 ‘섀도우’를 처치하는 전문 사무소 ‘엑스 에이전시’ 소장이 되어 각종 마물은 물론, ‘섀도우’의 부산물인 ‘크리스탈’을 차지하려는 대기업 ‘WSC’와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소장의 역할은 ‘섀도우’에 맞설 ‘헌터’를 수집 및 육성하고 각종 임무를 수행하며 ‘크리스탈’을 모으는 것이다. 게임 방식은 모두가 적인 프리포올(free-for-all) PvP로, 작은 사각형 타일 수십 개로 이루어진 정방형 맵에서 진행된다. 맵 타일은 ‘조사’를 통해 무기를 얻을 수 있는 ‘팩토리’, ‘무도관’, ‘투기장’ 등과 회복 아이템이 나오는 ‘병원’, ‘레스토랑’ 등이 있으며 특별한 스킬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산’과 ‘강’도 존재한다.


▲ '엑스 에이전시' 사무소장이 되어 전세계 '헌터'들과 쟁탈전을 벌인다


▲ 타일에 따라 이동할 수 없거나, 아이템을 획득하는 등 다양한 특성이 있다

‘헌터’의 표적은 어디까지나 ‘섀도우’지만, 평소에는 유저들 사이에 섞여있어 분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쟁자들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며 장비를 갖추고 의심되는 유저에게 PvP를 걸어야 한다. 전투에선 빠른 공격, 강공격, 가드, 그리고 스킬까지 네 가지 커맨드가 주어지는데, 강공격은 가드를 무너뜨리지만 빠른 공격에 제압되고, 빠른 공격은 가드에 막히므로 상대의 수를 짐작해 커맨드를 골라야 한다. 스킬을 통해 보다 복잡다단한 심리전을 거는 것도 가능하다.

“처음 의도는 모바일에서 즐기기 쉬운 PvP를 만들어보자는 거였죠. ‘오버워치’나 ‘롤’처럼 멀티플레이 대전이 주가 되고, 한 판을 짧고 집약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그런데 모바일은 필연적으로 데이터 전송이 지연되니 컨트롤 위주의 대결은 무리였습니다. 대신 턴을 주고 받으며 가위바위보로 심리전을 펼치게 기획했어요. 이러한 플레이에 맞춘 최적의 동선을 짜다 보니 맵도 자동 생성하지 않고 하나하나 직접 만들게 됐습니다”


▲ 전투는 가위바위보 심리전, 스킬을 이용한 약간의 블러핑도 가능하다


▲ 물론 궁극적 목적은 '섀도우', 이 녀석을 쓰러트려야 최종 승자가 된다

엑소시스트로 돌아온 ‘파스크란’? 캐릭터 중심의 옴니버스 시나리오 

모바일게임은 으레 내용이 빈약하고 시나리오의 얼개가 허술하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하얀 로냐프 강’을 쓴 이상균 PD가 직접 집도하는 작품이라면? 과거 그의 소설을 열독한 유저라면 당연히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을 기대할 것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설정이기에 더욱 흥미가 동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능력자물은 만화나 소설로는 익숙하지만, 게임으로는 아직 낯선 소재다. 정통 판타지로 명성을 거머쥔 이상균 PD이기에 더욱 이색적이다.

“그간 다양한 글을 썼는데 ‘하얀 로냐프 강’이 유독 잘 알려졌을 뿐, 스스로 판타지 소설가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판타지 설정의 게임은 나올 수 있는 캐릭터 표현이 뻔해요. 우락부락한 전사, 섹시한 마법사, 어리고 귀여운 요정 등등… 그보다는 현대물이 ‘엑스 에이전시’의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하기에 훨씬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 '헌터' 개개인의 이야기 모여 큰 줄기를 이루는 옴니버스 시나리오

다만 PvP게임 특성상 일반적인 RPG마냥 이야기를 전개할 수는 없다. 대신 이상균 PD는 주연 캐릭터인 ‘헌터’ 개개인에 집중했다. 임무 중 입수한 ‘조각’으로 새로운 ‘헌터’를 해금하고, 그에 얽힌 시나리오를 보며 전체적인 세계관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양한 시간대에서 전개되며 몇몇은 한가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유저가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고, 새로운 캐릭터를 수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엑스 에이전시’의 목표다.

현재 준비된 ‘헌터’는 당찬 소녀 격투가 ‘애쉴리’, 부하의 복수를 꿈꾸는 전직 군인 ‘베르트랑’, 성당기사단의 후예 ‘케인’ 등이 있다. ‘하얀 로냐프 강’ 독자를 위한 깜짝 선물도 있는데, 주인공 ‘퀴트린’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린 비운의 기사 ‘파스크란’이 현대의 엑소시스트로 부활한 것이다. 이상균 PD는 “’엑스 에이전시’ 세계관에 ‘파스크란’이 살았다면? 이라는 가정 하에 캐릭터를 재구성했습니다. 원작에 보면 상당히 오글거리는 대사를 멋있게 내뱉는 것이 ‘파스크란’의 특징인데, 그런 느낌이 잘 살아서 만족합니다”며 웃었다.


▲ '하얀 로냐프 강' 인기 캐릭터 '파크스란'이 엑소시스트가 되어 돌아왔다

향후 다른 소설 속 캐릭터도 참전할 수도 있으려나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파스크란’ 하나로 만족합니다. 개인적으로 ‘하얀 로냐프 강’은 애증의 작품이에요. 소설가의 명성을 가져다 줬지만, 개발자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아마 앞으로 어떤 게임을 만들더라도 ‘하얀 로냐프 강’의 요소가 조금씩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 ‘엑스 에이전시’에 ‘파스크란’말고도 이스터에크를 하나 더 숨겨놓았는데,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리 어렵지 않으니 원작 팬이라면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웃음).”

끝으로 여느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엑스 에이전시’만의 실험적 스토리텔링 방식도 특기할만하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크리스탈’의 존재를 일반에 알린 것은 ‘디렉터 K’라는 캐릭터인데, 이는 사실 이상균 PD 본인이다. 이 PD는 ‘디렉터 K’라는 이름으로 게임 내에 직접 개입하면서 동시에 공식 카페를 통해 유저들과도 소통한다. 이처럼 작가가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은 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주로 나타나는데, 모바일게임과의 접목은 매우 이례적이다.


▲ 게임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상균 PD의 페르소나 '디렉터 K'

투자금 회수가 아닌, 개발자와 유저의 ‘로망’을 이루고 싶다

참신한 시스템과 흥미로운 스토리,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엑스 에이전시’의 첫 이상은 ‘지나치게 생소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썩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PvP게임 특유의 반복성과 단조로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과금 유도는 적당한 선일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에 이상균 PD는 “아마 한번 해보면 이거 이거 돈 벌 생각이 없구만… 싶을 겁니다”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평범하게 게임만 즐겨도 모든 콘텐츠를 해금할 수 있고, 그럼에도 캐릭터에 애정을 느낀 유저가 돈을 쓰리라 믿는 순진무구한 수익모델이라고.

콘텐츠 소모에 대한 방책도 나름 탄탄히 마련해놓았다. 우선 다양한 승리조건을 지닌 게임판이 근시일 내에 2개 더 추가될 예정이며, 매달 신규 캐릭터가 1명씩 투입된다. 여기에 가지고 있는 ‘헌터’가 전부 출전해 차례로 싸워 연승 기록을 재는 ‘연승전’과 유저끼리 협력해 강력한 AI를 쓰러트리는 ‘협력전(블랙슈트전)’도 준비 중이다. 심리전이 주축이 되는 게임답게 유저인지 AI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수준으로 개발 중이라고.


▲ 저마다 사연을 지닌 채 모여든 '헌터', 매달 1명씩 꾸준히 추가될 예정

“이번 프로젝트는 ‘시장이, 유저들이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도전입니다. 단순히 투자금 회수에 급급한 것이 아닌, 참신한 게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회사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유저들이 ‘이 스튜디오가 만드는 다음 게임이 궁금하다’고 생각하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입니다. 물론 ‘엑스 에이전시’가 시장에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더욱 좋겠죠. 개발자에게도 유저에게도 그런 로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엄마, 아빠로 살아가고 있을 옛 독자 여러분! 모두의 ‘로망’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빌려주세요(웃음).”


▲ '엑스 에이전시'를 통해 개발자와 유저의 로망을 이루고 싶다는 이상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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