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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문명의 아버지, 시드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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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a game is a series of interesting choices)"

1989년, 한 남자가 GDC(GAME DEVELOPERS CONFERENCE, 게임개발자컨퍼런스)에서 언급한 이 말은 "게임이란 무엇인가?"라는 게임사의 가장 어려운 논제에 대해 가장 유쾌하고 명쾌한 답변으로 통한다. 지금도 우리는 '게임' 자체를 쉽게 정의하지 못한다. 이는 게임이 잉태한 순간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도 쉽게 설명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때문에 이 남자가 언급한 '선택'은 게임을 온전히 설명하는 가장 근접한 열쇠 정도로 내려져 왔다.

이 말을 언급한 사람은 [문명] 시리즈로 세계를 '선택의 마성'에 빠뜨린 시드 마이어다. 그가 언급한 '선택'은 사실 그의 게임개발철학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선택'은 게임개발자가 아니라 실제 플레이어가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때문에 모든 게임은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보고 두드리고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 디자인의 가장 원론적인 발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드 마이어는 이 '선택'이라는 키워드를 어디서 어떻게 찾게 됐을까?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문명]의 아버지, PC게임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시드 마이어

첫 번째 선택, 한 남자의 사업 제안을 수락하다

시드 마이어는 1952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났다. 다만,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건너가 사실상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감성적인 소년이었다. 특히 세계 역사와 관련된 서적에 큰 관심을 보였고, 17세기 카리브 해 해적 이야기 등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시드 마이어는 보드게임을 즐겼다. 그간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여러 조각이 바로 이 보드게임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부분에서 궁합이 맞았던 셈이다. 그는 가족들과 [모노폴리] 같은 게임을 즐겨했고, 나이가 어느 정도 찬 이후에는 군사(軍事)를 주로 묘사한 미국 아발론힐 사의 보드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게임의 선택 역시 취향에 따라 역사과 군사 따위 등으로 압축된 셈이다.

이후 시드 마이어는 미시간 대학에서 역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다. 이때부터 그는 IBM 컴퓨터 등에 심취하게 되는데, 기본적인 학업 외에도 갖가지 작은 게임을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시드 마이어는 제너럴 인스트루먼트라는 회사에 취직해 컴퓨터 엔지니어 생활을 시작했다. 지역 상점에 자동화 프로그램을 설치해주고 종업원을 교육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물론 이 일은 시드 마이어가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년이었던 그는 어디까지나 생활할 자금이 필요했고, 결국 전공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 것이다. 때문에 시드 마이어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주로 게임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만 해도 시드 마이어는 게임개발자라는 직업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게임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워낙 게임을 좋아한데다 프로그래밍 실력도 출중하겠다, 직접 만드는 과정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시드 마이어 자신도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음을 느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게임개발을 '취미'라는 범주에 넣은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1981년. 시드 마이어가 30대로 넘어갈 무렵, 한 남자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바로 빌 스텔리다.

 

빌 스텔리는 미국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전투기를 조종한 공군 대령 출신이었는데, 퇴역 이후 펜타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두 남자의 인연은 한 컴퓨터 컨퍼런스에서 이루어졌다. 현장에서 진행된 미팅에서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시드 마이어는 인사를 건네는 중 상대가 공군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호기심이 커져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군사로 통했던 둘은 계속 이야기가 파생됐고, 덕분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 시드 마이어와 함께 마이크로 프로즈를 설립한 빌 스텔리


두 남자의 이런저런 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터리 아케이드 게임 [레드바론]으로 이어졌다. 시드 마이어는 워낙 게임을 좋아했던 만큼 해당 게임의 '실력자'였고, 빌 스텔리는 아무리 해도 점수가 오르지 않는 '초보자'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시드 마이어는 게임을 분석하고 패턴을 이해하면 더 쉽게 플레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여기서 빌 스텔리는 시드 마이어의 말에 큰 관심을 두게 된다. 그가 하는 말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이론에 가까웠다. 즉, 게임 개발자가 들려주는 그런 이야기 같았다.

게다가 시드 마이어는 한술 더 떠 빌 스텔리에게 "내가 만들면 1~2주 안에 더 좋은 게임을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간 취미 삼아 게임을 만들었던 만큼, 자신감이 있었던 시드 마이어의 호기였다.

빌 스텔리는 당시 그가 구상 중인 어떤 사업의 최고 파트너가 시드 마이어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빌 스텔리는 게임 사업을 하고 싶었고, 이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컴퓨터 컨퍼런스에 참가한 것이다. 고민할 것도 없이 빌 스텔리는 시드 마이어에게 함께 회사를 창업해 게임사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여기서 시드 마이어는 고민에 빠진다. 어린 시절부터 게임을 접했던 그였지만, 개발자의 길이 과연 미래가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이도 서른을 바라보고 있어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이래저래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빌 스텔리는 고민에 빠진 시드 마이어를 약 2주에 걸쳐 설득했다. 게임개발은 시드 마이어가 주도적으로 하고, 사업 전반은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달콤한 미래'로 마음을 흔든 것이다. 결국, 시드 마이어는 그의 게임개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첫 선택을 한다. 게임사업에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1981년, 그렇게 두 남자는 1,500달러를 모아 마이크로 프로즈(Micro Prose)를 창업했다. 시드 마이어가 게임 개발자 인생을 걷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 시드 마이어와 빌 스텔리는 아케이드게임 [레드바론]을 계기로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

두 번째 선택, 시드 마이어를 전면에 내세우다

마이크로 프로즈에서 게임 개발자 인생을 시작한 시드 마이어는 바로 연구개발 단계에 돌입했다. 그렇다고 여기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여전히 확신이 없었던 시드 마이어는 기존에 다니던 회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회사를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두 남자는 각자의 회사에 다니면서 밤에만 시간을 내 마이크로 프로즈에서 게임개발을 연구했다. 시간이 짧았던 만큼 첫 게임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남자는 연구 단계에서 게임이 주는 가능성에 확신을 가졌다. 특히 시드 마이어는 취미가 아닌 직접 게임 개발에 매진하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결국, 둘은 기존 회사를 정리하고 온전히 마이크로 프로즈에 집중했다. 그간 연구한 것을 기반으로 서서히 첫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였다.

첫 게임은 82년에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스핏파이어 에이스]다. 이 게임은 두 남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비행 시뮬레이션 기반의 게임이었다. 판매량이 높은 건 아니었지만 다음 게임을 내놓을 수준은 충분했다. 이후 그들은 [헬캣 에이스(82)] [나토 커맨더(84)] [솔로 플라이트(84)] [사일런트 서비스(85)] [F-15 스트라이크 이글(85)] [건쉽(86)] 등의 게임을 내놓으며 명성을 쌓게 된다. 특히 [F-15 스트라이크 이글]은 최초 비행전투 시뮬레이션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시드 마이어의 개발력과 군사 전문가인 빌 스텔리의 힘이 잘 조화된 셈이다.

그렇게 1987년, 마이크로 프로즈는 군사 시뮬레이션 게임회사로 최고 명성을 쌓아올린다. 1,500달러에서 시작한 회사 자금도 어느새 2,000만 달러 이상을 기록할 정도였다. 30대 두 남자의 궁합이 빚어낸 놀라운 성과였다.


▲ 시드 마이어와 빌 스텔리가 호흡해 만든 [F-15 스트라이크 이글]

이 과정에서 시드 마이어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직접 게임을 만들다 보니 꼭 군사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다른 소재의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게임개발자로서 그의 창작 본능이 본격적으로 꿈틀인 시기다. 이에 시드 마이어는 어린 시절 꿈을 하나 꺼내 들었다. 항해와 모험이 떠오르는 한 소년의 로망, 바로 해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에 시드 마이어는 빌 스텔리에게 '해적'에 대한 소재로 게임을 만들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빌 스텔리는 여기에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마이크로 프로즈는 군사 시뮬레이션으로 명성이 올라 있는데, 뜬금없이 비현실적인 해적을 소재로 하는 것은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다행히 당시까지 두 남자의 신뢰를 끈끈했다. 갈등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빌 스텔리가 한 발 물러서 양보하는 것으로 의견을 통일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바로 게임 표지에 '시드 마이어'라는 이름을 달아두자는 것이다. 마이크로 프로즈의 군사 시뮬레이션은 모두 시드 마이어가 만든 것이고, 이 게임 역시 그가 만든 것이니 신뢰해도 된다는 어떤 증표와 같은 의미를 두자에서 비롯한 조건이었다. 사실 시드 마이어는 이런 조건이 무척 부담스럽고 창피했다. '내가 뭐라고…' 게임개발에 자신감이 있던 그였지만, 막상 세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게임을 출시한다니 자랑스러운 것보다 부끄러운 마음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시드 마이어도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빌 스텔리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든 게임은 결국 [해적]이라는 게임명으로 정해졌는데, 이후 앞에 그의 이름을 넣어 [시드마이어의 해적]으로 확정됐다.

[해적]은 시드 마이어가 도전적으로 밀어붙인 게임이지만, 그럼에도 내용 자체는 무척 훌륭했다. 스토리를 넣어 주인공이 왜 해적이 됐는지 동기부여를 부여하는 것은 물론, 카리브 해의 전투를 기본 골격으로 하면서 여기저기 숨겨진 보물을 찾는 어드벤처성 요소도 삽입했다. 무작위 요소도 잘 버무렸다. 게임을 진행하면 게임 내 국가의 정치적 상황이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플레이어는 여기서 선택을 통해 해야 할 일을 직접 정할 수 있었다.

훗날 시드 마이어는 보드게임을 PC로 이식한 어드벤처 장르의 [7개의 황금도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는데, 그가 직접 만든 [해적]은 이를 뛰어넘으며 자유도에 기인한 샌드박스 스타일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시드 마이어가 플레이어로 하여금 선택하는 플레이를 유도한 것은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해적]은 게임을 플레이함에 있어 상상력이 무척 중요한데, 바로 이 상상력을 시드 마이어 본인에게 맞춘 것이 아니라 게이머 모두에게 풀어두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난 이렇게 하는데, 넌 그렇게 해도 돼'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었다.

결과적으로 [해적]은 출시(1987) 이후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에는 드문 PC게임이라 판매량이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더 큰 성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게임 타이틀에 '시드 마이어'를 달아둔 전략이 통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어떤 측면에서의 새로운 시도. 이를 계기로 '시드 마이어'는 신뢰의 증표로 작용하게 된다.


▲ 샌드박스의 기원으로 불리는 [시드마이어의 해적]

세 번째 선택, 인간의 문명을 게임으로…

[해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시드 마이어는 이후부터 서서히 눈높이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군사 시뮬레이션은 특정 소수를 위한 게임이었지만, [해적]은 불특정 다수에게도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이에 시드 마이어는 어떤 전문지식 없이도 성인이라면 누구나 쉽고 즐겁게, 그리고 정교하게 할 수 있는 게임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아예 군사 시뮬레이션을 놓은 것은 아니다. [해적] 이후에는 미국의 군사 소설가이자 관련 게임의 상징적인 존재로 알려진 톰 클랜시(66세로 별세)와 [레드스톰 라이징(88)]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시드 마이어가 어떤 특별한 게임에 갈망이 있었다고는 하나, 당시 그는 어디까지나 마이크로 프로즈 소속이었다.

이렇게 시드 마이어가 게임개발에 집중하던 사이, 미국 전역을 강타한 게임 하나가 등장한다. 바로 윌 라이트의 [심시티(89)]다. 건축 시뮬레이션으로 세상을 뒤흔든 이 게임은 시드 마이어에게 큰 영감을 준다. 주제나 장르가 무엇이든 일단 게임으로 잘 내놓기만 하면 그게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시드 마이어는 [심시티]를 지켜보며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한편 '나도 충분히…'라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결국, 시드 마이어는 또 한 번 군사 시뮬레이션을 뒤로 미루고 '다른 게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철도를 주제로 한 게임이었다. 훗날 시드 마이어 자신이 밝혔듯 이 게임은 [심시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게임이다. 그러나 내용와 플레이 방식은 달랐다. 시드 마이어가 계획한 이 게임은 경영에 초점을 두고 플레이어가 철도 회사를 운영하면서 각 도시와 산업시설 사이에 승객과 물자를 운송하고 수입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결국, 이 게임은 출시 이후 큰 호평을 받으며 또 한 번 성공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레일로드 타이쿤(90)]이다.

이 게임 역시 앞에 '시드 마이어'를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뢰의 증표는 또 한 번 작동했고, 그렇게 이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음은 물론 경영 시뮬레이션 장르의 시초가 돼 버렸다. '타이쿤'이라는 키워드 역시 하나의 장르로 확립돼 훗날 [롤러코스터 타이쿤] 같은 인기게임에 탄생할 수 있게 한 힘이 되기도 했다.


▲ 타이쿤 장르의 지평을 연 [시드마이어의 레일로드 타이쿤]

[레일로드 타이쿤] 이후 시드 마이어는 바로 두 번째 게임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서 두 번째라는 것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그는 해적과 같이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주제에 맞게 게임을 제작해보고 싶었다. '역사, 인물, 사건, 전쟁…' 갖가지 키워드가 떠올랐다. 그러다 그는 이런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단어를 찾게 되는데, 바로 '문명'이었다. "문명은 게임으로 내놓는다면?" 순간 시드 마이어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심오한 주제였다. 문명을 게임으로 표현한다? 기발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거 같은 그런 내용이었다.

결국, 시드 마이어는 1980년 출시된 보드게임 [문명]과 함께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PC게임 [7개의 황금도시]와 [심시티] 등을 떠올렸다. 이를 잘 활용해 게임 디자인과 시스템을 잘 설계하면 답이 나올 거 같았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 시작했다. 시드 마이어는 원래 이 게임은 실시간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구현하려고 했으나, 프로토타입이 나온 이후 턴 제 방식으로 변경하게 된다. 실시간은 플레이어 중심이 아닌 제삼자가 진행하는 느낌이 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드 마이어는 무엇보다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는 몰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스템 설계는 난관에 난관이었다. 이에 그는 4X(탐험-explore, 확장-expand, 개척-exploit, 점령-exterminate)가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먼저 심혈을 기울였고, 이후 그 안에서 갖가지 문명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동시에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사회가 구현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심시티]와 달리 세계정복과 과학승리 등의 명확한 목표도 있었다. 기본적인 시스템은 보드게임 [문명]의 골격을 PC에 이식하는 형태였지만, 사실 이 부분은 프로그래밍와 인간의 역사에 식견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특히 방대한 게임 볼륨은 PC게임으로 구현하기 복잡하고 난해했는데, 이를 하나씩 파고들어 컴퓨터 코드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이렇게 완성된 [문명(91)]은 출시 이후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만큼 결과는 경이로웠다. 사람들은 PC 앞에서 [문명]에 접하는 순간 모두 현실을 떠나 어떤 한 시대의 개척자로 바뀌어 있었고, 14개의 서로 다른 국가와 문명, 도시 발전에 매진하며 [문명]에 빠져버렸다. 결국, 이 게임은 600만 장이나 판매되며 대박을 터뜨린다. 시드 마이어가 속해 있는 마이크로 프로즈 역시 이 시기에 어마어마한 돈을 벌며 명성을 크게 쌓아올렸다. 상징적인 부분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게임은 깨고 부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철학을 결합한 거의 최초의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명] 역시 게임명 앞에 '시드 마이어'가 넣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시드마이어의 문명]. 전 세계를 '선택의 마성'에 빠른 이 게임의 역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 전설의 시작! 시드 마이어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문명]

네 번째 선택, 마이크로 프로즈를 나와 파이락시스 게임즈로

[문명]의 성공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게 된 시드 마이어는 이후에도 마이크로 프로즈에서 갖가지 게임을 개발했다. 그러나 92년에 이르러 서서히 회사와 시드 마이어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마이크로 프로즈는 [문명]으로 큰 성장함에 따라 대규모 인력을 고용해 규모를 불렸는데, 효율성이 떨어지면서 재정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결국 1993년, 마이크로 프로즈는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에 인수된다. 재정난은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덩치가 너무 커져 버린 상황은 해결되지 못했다. 특히 시드 마이어는 자신을 포함한 소수의 인력으로 전심을 다 해 게임을 개발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대규모 인원이 엮이는 프로젝트는 잘 맞지 않았다. 프로듀서이긴 했으나 사실 게임개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보다 간접적으로 관리하는 비중이 커졌다. 여기서 그는 회의를 느낀다.

회의감에 빠진 시드 마이어는 결국 자신이 창업한 마이크로 프로즈를 나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내부 이해관계 때문에 무작정 나올 수는 없었다. 결심은 굳혔지만 [문명]의 후속작을 만들어야 했다. 이에 시드 마이어는 스스로 디렉터를 하기보다 조언자 정도로만 활약하고, 그 아래 메인 디렉터 3명을 두게 됐다. 그 3명이 [문명2]의 디렉팅을 맡은 브라이언 레이놀즈, 제프 브릭스, 더글라스 캐스피언 카프만이다. 이들 3인은 '마이어 사단'으로 알려졌으며, 훗날 파이락시스 게임즈에서 [문명]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1996년 출시된 [문명2]는 전작의 명성을 이어받아 큰 인기를 누렸다. 게임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됐지만, 그래픽과 시스템 확장 등에 이루어진 까닭에 세계는 또 한 번 [문명]에 빠져들 정도였다.


▲ 버그가 있었지만 시스템을 대폭 확장해 인기를 누린 [문명3]

시드 마이어는 [문명2]를 출시한 뒤에 바로 마이크로 프로즈는 나온다. 그리고 [문명2]의 메인 디렉터 중 한 명이었던 제프 브릭스와 새로운 게임개발사 파이락시스 게임즈를 설립했다. 파이락시스 게임즈는 설립 단계부터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개발과 유통을 동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게임개발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제프 브릭스는 순수한 개발사가 가야 할 길을 잘 아는 유능한 경영자이자 개발자였다. 두 남자의 호흡은 잘 맞았다.

게임 개발자로서 온전히 자리를 굳힌 시드 마이어는 이때부터 다시 게임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드마이어의 게티스버그!(97)] [시드마이어의 알파 센타우리(99)]가 차례로 출시됐다. [게티스버그!]는 [문명]으로 할 수 없었던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형태로 설계됐고, [알파 센타우리]는 [문명]의 미래 버전으로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게임을 각색해 내놓은 형태였다. 두 게임 역시 인기를 누리며 파이락시스 게임즈를 성장시켰다.

이후 2001년에는 [문명3]가 출시된다. 마이크로 프로즈가 아닌 파이락시스 게임즈를 통해 등장한 [문명]의 첫 시리즈였다. [문명3]는 초기 갖가지 버그로 몸살을 앓기도 했지만, 시스템을 대폭 확장하고 콘텐츠를 더 채워넣음으로써 또 한 번 인기를 누리게 된다. 파이락시스 게임즈의 역시 시드 마이어와 함께 큰 명성을 얻게 된다.

[문명3] 이후 시드 마이어는 윌 라이트와 함께 [시드 마이어의 심골프(02)]를 제작하기도 했고, 기존의 [해적]을 리메이크한 [시드 마이어의 해적(04)]을 내놓기도 했다. 이후에는 3D로 전환한 [문명4(05)]가 나왔고, 가장 최근 시리즈로 알려진 [문명5] 역시 2010년에 출시돼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뿌려내기도 했다.


▲ 국내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킨 [문명5]

앞으로도 계속될 [문명] 신드롬과 시드 마이어의 선택

1990년. 한때 미국에서 [문명]은 저평가되기도 했다. 한 신문에서는 "문명이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시뮬레이션 좋아하는 게이머들이나 반길 게임" 정도로 표현되기도 했다. 물론 [문명]은 이 기사가 나온 이후, 전 세계적으로 팔려나가며 세계 최고의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부상해 버렸다.

그렇다면 [문명]은 왜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깊이'와 '선택'에 있다. 사실 [문명]은 [심시티]와 자주 비교된다. 물론 두 게임 모두 훌륭하다. 다만 [심시티]는 윌 라이트의 게임관이 그대로 반영돼 어린아이들도 쉽게 잠깐잠깐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같은 느낌으로 설계됐다. 그러나 [문명]은 시작부터 볼륨을 크게 키워냈고, 플레이어에게 명확한 목표의식을 부여했다. 이는 곧 인간의 역사와 철학까지 내재된 '작품' 중 하나였다. 그만큼 깊숙이 파고들수록 이 게임은 더 흥미롭게 진행되고, 그렇게 헤쳐 나가다 보면 게이머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또, 이런 깊이는 시드 마이어가 늘 강조한 '선택'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시드 마이어는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깊이는 곧 선택이라고 표현한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에서 지나갈 수 있는 여러 갈래의 길과 마주하게 되는데, 여기서 선택에 따라 각자의 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플레이어는 몇 개월을 더 투자해 새로운 길, 혹은 못 가본 길을 찾기 위해 더 헤매고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시드 마이어는 과거 [해적]은 물론 [문명]까지, 바로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끝까지 고수한 까닭에 지금의 명성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드 마이어는 무척 부끄러움이 많은 남자다. 자신의 이름을 타이틀에 넣자는 제안에도 무척 부끄러웠고, [문명]이 성공한 이후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다. 자신은 그저 하고 싶은 게임 개발에 집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명성을 쌓게 된 이후, 각종 강연에 나서면서 자신의 게임관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부끄러웠지만 여러 후배 게임개발자를 위한 '선택'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강연에서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 "게임 제작은 장르가 아닌 소재를 먼저 구상해라" 등의 명언이 탄생하기도 했다.


▲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상을 받은 시드 마이어는 각종 강연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사실 시드 마이어는 첫 번째 [문명] 이후 다음 시리즈부터는 디렉터로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언자 역할을 하면서 젊고 유능한 개발자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러나 그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선택'과 '깊이'에 연구했고,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플레이어들이 감탄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흔히 [문명]을 가리켜 '악마의 게임'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의미다. 플레이어는 PC 앞에 앉는 순간 현실을 벗어나 어떤 한 시대의 초월자로 문명의 개척과 발전, 그리고 정복에 매진한다. 시드 마이어가 위대한 게임개발자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런 게임'을 만들 수 있었던 어떤 능력과 감각이다.

[문명]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계속 인기를 얻는 것도 여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몇 년이 지날 때마다 세계는 더 많은 게이머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이 [문명]을 접했을 때, 그 경이로운 감정은 십수 년 전 선배(?) 게이머가 느낀 그 감정과 다를 게 없다. 또, 시대 발전에 따라 그에 맞는 기술력을 포용하고, 게임 자체를 꾸준히 발전시킨 노력 역시 [문명]의 유경험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결정적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2010년, [문명5]가 나왔을 때 한 차례 신드롬이 나타나기도 했다. "문명하셨습니다" 같은 [문명] 특유의 중독성을 빗댄 유행어가 인터넷을 강타했고, 덕분에 게임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두는 기이한 사회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연예인들까지 나서 [문명]으로 소통했으니, 참 대단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시드 마이어가 빚어낸 [문명]은 '선택의 마성' 앞에서 지금도 '악마의 게임'으로 우뚝 서 있다.


▲ [문명5]는 국내에서도 신드롬을 일으키며 기이한 사회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시드 마이어, 그의 선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올해로 60세가 된 시드 마이어는 여전히 파이락시스 게임즈에서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가 이런 고령의 나이까지 게임 개발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그의 인생에 따른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는 그가 빚어낸 또 다른 어떤 게임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나는 자유로운 의지라는 걸 믿어요. 선택권을 만드는 것은 게임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죠. 그리고 그것은 삶의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해요. 모든 사람은 수많은 굴곡에 놓여 있고, 여기서 어떤 대답(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래요, 당신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겠죠. 당신이 이길지 질지. 그리고 점수는 몇 점인지(웃음)"
- 시드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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