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기본은 보급이다. 보급이 끊긴 군대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현대 군대는 이를 위한 다양한 방책과 거래를 진행하지만, 20세기 초에는 전쟁이 장기화되고 물자 수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식민지의 자원 약탈을 자행했다.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야견박살령’ 또한 이런 목적이다. 야견(들개)을 박살하는(죽이는) 령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 내에 존재하는 들개를 잡아 죽이라는 명령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를 ‘한민족의 얼과 정기를 끊기 위한 일본의 말살’이라고 칭하기도 하나, 정확히는 사회문제인 광견병 창궐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운 ‘군복용 가죽’ 확보가 목적이었다. 1938년 일본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등재되며 보존지정견이 된 진돗개를 제외한 동경이, 삽살개, 불개 등 다양한 토종견이 사라지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 시기다.
이런 토종견들에 대한 의식 고취를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 있다. 조금은 미숙하고, 엔딩 또한 그 평이 나뉘고 있지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만은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 모바일 퍼즐게임 '페이드아웃'이다. 야견박살령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다룬 페이드아웃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게임메카는 제작사 9874랩 정지연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잊혀진 기억을 '페이드인'하기 위한 '페이드아웃'
1936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야견박살령을 공포하며 ‘개를 밖으로 내보내지 말거나, 내보낼 경우 지금의 이름표와 같이 목에 나무패를 달 것을 잊지 말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는 예방주사를 시행하라는 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이대로, 정확하게 시행되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확실한 것은 수많은 조선 토종견들이 도살당했다는 사실과, 현재 그 개체 수가 희소할 정도로 적다는 것뿐이다.
게임은 어느 날 할아버지가 개처럼 울부짖고 겁에 질린 듯 이상증세를 보이며 실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이 7년 만에 찾아뵙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되짚어 나가는 방식이다. ‘나이를 먹으니 드디어 미친 것’이라 하나같이 말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에 개의치 않고, 이를 단순한 노환이 아님을 깨달은 주인공이 할아버지 집 곳곳을 살피며 단서를 얻으며 진행된다.
집 곳곳에 남겨진 바래고 사라진 증거를 습득하는 일은 퍼즐을 활용해 게임으로 풀었다. 4x4 퍼즐, 수수께끼, 암호 풀이 등 간단하고도 다양한 퍼즐로 모은 단서는 모두 과거의 전말을 깨닫는 단서다. 퍼즐을 풀어나갈수록 주인공과 플레이어는 일제의 일을 도운 할아버지의 과거와 야견박살령에 대해 알게 된다.
페이드아웃은 교육적인 메시지나 개과천선을 언급하진 않는다. 그저 있었던 사건과,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담히 전한다. “소셜 임팩트 장르가 곧 교육콘텐츠는 아니기 때문에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에게 수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회적인 메세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플레이를 시작하는 유저들도 많다”는 것이 정 대표의 말이다. 이는 게임 제작 과정에서도 특별히 신경 쓴 부분으로, 결말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유저의 몫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짧고 굵은 임팩트
9874랩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게임을 제작하고 싶은 친구들이 모인 팀이다. 개발사의 목적 자체가 임팩트게임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팀원 모두가 게임 개발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개발 과정에서 “이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곧잘 들었다고 한다. 출시 후에도 확신은 없어, 그저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을 뿐’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때가 되어서야 ‘이게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걸 고쳤어야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드아웃 개발 과정 자체가 시행착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야견박살령을 다루게 된 이유는 아이디어 회의에서 시작됐다고 전했다. 항상 좋아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 회의였기에, 당시에도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동물’에 주목하게 됐다. 그 중 특히 손꼽힌 것이 바로 개다. 이어 개에 대해 다양한 접근방식을 취하던 중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들 중 토종견은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에 대해 조사하다 ‘야견박살령’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지난 BIC 페스티벌 2022에 참가한 페이드아웃 부스에는 많은 이들이 방문했다. 현장에서 다양한 피드백을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느 개발사 대표의 방문이었다. 그는 “온라인으로 해봤던 플레이가 감명 깊었다”는 평과 함께 궁금한 점이 있어 부스를 찾아왔다고 했다. 정 대표는 그 과정에서 작품에 대한 깊은 이야기와 함께 반성할 점을, 또 한편으로는 관심을 가져준 데 대한 감사함을 느꼈다. 정 대표는 “스케일 큰 게임들 사이에서 조금 기가 죽어있는 상태였는데 덕분에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외에도 정 대표는 현장에서 다양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플레이타임이 적어 아쉽다는 피드백 또한 받았는데, 사실 이는 9874랩의 의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게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던 만큼, 적은 분량이 더욱 효과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즌 2나 다음 챕터를 기대하는 의견이 많아, 다음 게임에서는 플레이타임을 늘리는 방법을 고려 중이라 전했다.
다음에도 소셜 임팩트 게임을 만들고 싶다
정 대표는 “인디게임은 놀이터 같다. 놀이터에서는 경쟁도 규칙도 없다. 미끄럼틀을 타든 흙을 퍼서 모래성을 쌓든 내 마음 가는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인디게임도 제작자의 상상을 마음껏 펼치고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닮은 것 같다”고 밝혔다. 이를 보여주듯, 페이드아웃은 실제로 9874랩의 목적을 마음가는대로, 그러면서도 뚜렷하게 보여줬다.
인터뷰 마무리에서, 정 대표는 다음 게임 개발도 소셜 임팩트게임으로 도전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다만, 아직은 정확한 주제나 계획이 세워지지는 않아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첫 시도만으로 유의미한 성과와,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했기에 이들의 다음이 걱정스럽지는 않다. “페이드아웃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다음에도 좋은 게임으로 찾아뵙겠다” 말하는 정 대표와 9874랩의 다음 메시지가 과연 어떻게 더 나은 모습으로 전달될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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