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게이머들에게 가장 동경의 대상이 된 게임기는 뭐니 뭐니해도 ‘네오지오’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오락실게임과 콘솔게임이 동등한 수준으로 나오는 게 당연한 시대지만, 당시 둘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아래 오로지 네오지오 만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수준 높은 게임기였다. 물론 오락실과 동일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게임 팩 한 개당 3~40만 원에 가까운 가격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가격이야 어쨌건, 네오지오는 아케이드의 게임을 그대로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초고성능의 럭셔리 게임기였다. 덕분에 비록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게이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1998년, 일이 터지고 말았다. 바로 네오지오의 개발사인 SNK에서 돌연 ‘네오지오 포켓’이라는 새로운 게임기를 내놓은 것이다.
네오지오 포켓은 네오지오의 휴대용 버전이며, 닌텐도의 게임보이를 타겟으로 출시한 제품이다. 그와 걸맞게 광고 마케팅 방법도 상당히 전투적이어 눈길을 끌었다. 네오지오 포켓은 ‘I’m not a boy-누구라도 소년을 버리는 때가 온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게임보이를 버리고 새로운 게임기로 전환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 네오지오 포켓 (사진 출처: 네오지오 포켓 공식 사이트 아카이브)
SNK- 네오지오 포켓
네오지오 포켓은 네오지오의 휴대용 버전이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킹 오브 파이터즈’와 ‘사무라이 스피릿츠’와 같은 다양한 오락실 격투게임을 대표 타이틀로 내세우며 등장했다. 하지만 정작 게임은 SD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간략한 게임이었기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발매 전, 의외로 각종 게임잡지 등에서 SD 캐릭터 게임임에도 괜찮은 게임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 게임기 자체 디자인의 뛰어남과 조작성에서 칭찬을 받았다. 특히 방향키가 기계식 스위치로 만들어져 마치 격투게임용 스틱을 조작하는 감각인데다가 엄지손가락에 가해지는 부담도 적어 특히나 좋은 평가를 얻었다.
▲ 게임보이를 의식한 듯한 I’m not boy라는 광고
(사진 출처: 네오지오 포 라이프)
발매 후, 상황은 역전됐다. 흑백화면이 주는 허전함 때문에 많은 게이머들이 실제로 만져보기도 전에 구입을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SNK는 상식적인 회사라면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네오지오 포켓은 당시 게임보이와 마찬가지로 ‘흑백’ 게임기였다. 그런데 SNK가 네오지오 포켓의 발매 전에 다른 게임쇼에서 네오지오 포켓 컬러라는 차세대 기종을 발표하고 만 것이다.
▲ 기대했던 것
(사진 출처 : 플레이스테이션 아카이브 공식사이트)
▲ 으아
▲ 현실 (사진 출처 : 레트로게임 복고의 관)
▲ ...
심지어 컬러 버전 발매일이 흑백 버전의 5개월 후로 책정돼, 많은 유저들에게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연히 판매량도 폭삭 망했다 싶을 정도로 떨어졌다. 심지어 주력 소프트였던 ‘킹 오브 파이터즈 R-1(이하 킹오파)’조차 제대로 즐겨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희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나마 ‘킹오파’와 ‘사무라이 스피릿츠’는 나은 경우. 이외의 게임은 축구, 테니스, 야구 등의 캐주얼게임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격투게임 이외의 소프트는 판매량 집계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처참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결국, 발매하자마자 2~3개월도 안 되서 빠르게 망한 게임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 킹오파 이외에 발매된 게임들. 게임성 자체도 80년대의 패미컴 게임 이하의 수준
(사진 출처 : 레트로게임의 관)
하지만 SNK는 흑백 버전의 실패를 그대로 이끌고 갈 수는 없었는지, 컬러 버전이 발매될 즘 SNK 자사의 타이틀만이 아닌 다양한 서드파티의 게임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때 기존의 휴대용 게임기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시도들을 더한다.
바로 SNK와 캡콤의 크로스 라이선스다. ‘스트리트 파이터’로 대표되는 캡콤,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의 SNK. 두 회사는 당시 2D격투게임의 양대 산맥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 당시부터 유저들은 캡콤 매니아와 SNK 매니아로 나뉘어서 인터넷상에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 게이머들은 서로 ‘류’(스트리트파이터 캐릭터)네, 쿠사나기 쿄(킹오파 주인공)가 더 세네, ‘테리’(역시 스트리트파이터 캐릭터)가 더 세네, 켄(역시 스트리트파이터 캐릭터)이 더 세다는 쓸데 없는 논쟁에 정열을 바치고 있었다. 요새는 좀 더 범위가 커져서 플레이스테이션이 좋다거나, Xbox가 좋다는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물론, 둘 다 당시부터 별 차이가 없었다는 소리다.
▲ 캡콤과 SNK의 대결
(사진 출처 : NEOGEO 공식 홈페이지 아카이브)
여하튼 캡콤과 SNK의 대결은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크로스 라이선스란 말 그대로 각자의 회사에서 상대 회사의 게임 캐릭터를 자사의 게임에 넣어 개발할 수 있도록 제휴하는 것이었으며, SNK에서는 네오지오 포켓으로 2개, 네오지오로 1개의 타이틀을 발매하기로 했다. 또, 캡콤은 아케이드 버전으로 2개의 타이틀을 계약했다.
하지만 네오지오 포켓으로 나온 크로스 라이선스 시리즈의 첫작품은 격투게임이 아닌 TCG형태로 발매됐다. 당시의 인기있던 ‘포케몬’처럼 SNK과 캡콤의 두 가지 버전으로 나온 것.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게임이었지만 워낙에 타이틀 가뭄에 시달리던 네오지오 포켓이었던지라 전용 게임 사상 처음 흑백/컬러 모두 3만 장을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 SNK VS CAPCOM의 카드게임 버전
(사지 출처 : 네오지오포켓 공식홈페이지 아카이브)
▲ SNK과 CAPCOM의 캐릭터가 싸운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기!
(사진 출처 : 네오포케의 전당)
▲ 격투게임 이외의 다양한 미니게임이 수록된 것도 특징
(사진 출처 : 네오지오 포켓 공식홈페이지 아카이브)
▲ 게임 동영상 (영상 출처 : 유투브)
그리고 이어서 발매된 격투게임 ‘정상결전 최강파이터즈 SNK VS CAPCOM’이 역사를 쓰게 된다. 사실 이 콜라보레이션은 SNK과 캡콤의 캐릭터가 싸운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인기몰이는 충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네오지오 포켓으로 나온 게임뿐만 아니라 당시 휴대용 게임기로 나왔던 모든 격투게임을 통틀어서도 최고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완성도로 나온 것.
SD캐릭터이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션, 풍부하게 구비된 기술, 다양한 게임 모드, 그리고 미니게임 등이 게이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야말로 이것 하나만 있어도 1년은 충분히 놀 수 있을 정도의 방대한 콘텐츠가 들어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먹었던 모든 ‘욕’을 씻을 만큼 많은 찬사를 받았다.
긍정적인 분위기는 수치로도 이어졌다. 평균 게임 판매량이 10,000장 이하를 밑돌았던 네오지오 포켓이 이례적으로 8배가 넘는 수치의 8만 장 가까운 매상을 올리며 공전의 히트(나름)를 기록했다.
크게 고무받은 SNK는 ‘SNK 갤스 파이터즈’, ‘월화의 검사’ 시리즈 등의 오리지널 격투게임과 ‘전설의 오우거 배틀 외전’ 같은 RPG 장르, ‘록맨’과 ‘소닉’같은 타사의 인기 프랜차이즈 소프트 등을 연달아 발매하며 매우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게 된다.
심지어 플레이스테이션의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도 네오지오 포켓으로 ‘아크 더 래드’ 등의 자사 프랜차이즈를 발표했다. 이때 소니는 당시 라이벌이었던 세가와 함께 소프트웨어 메이커로서 네오지오 포켓에 동시에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발매되지는 않았다.
▲ 전설의 오우거배틀 외전
(사진 출처 : 네오지오포켓 데이터베이스)
▲ SNK GALS FIGHTERS
(사지 출처 : 킹 오브 파이터즈 위키)
▲ 소닉 포켓 어드벤쳐
(사진 출처 : 네오포케의 전당)
▲ 록맨 배틀 파이터즈
(사진 출처 : 네오포케의 전당)
또한, 휴대용 게임기로서는 최초로 18세 이상 이용 가능한 게임인 ‘슈퍼 리얼 마작 프리미엄 컬렉션’이 출시되기도 하였다. 수위가 높다 보니 관련 자료를 올릴 수는 없지만,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필자는 전혀 보거나 해보지도 않았으며(?), 등장인물이 대부분 미성년자라는 것도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정상적인 사진만 편집해 보았습니다 하하
(사진 출처 : 네오지오 포켓 공식 홈페이지 아카이브)
결론을 말하자면, 네오지오 포켓도 게임기로서 상당한 선전을 한 제품이다. 하지만 처음 게임보이에 도전장을 내밀고 나선 것에 비교해 볼 때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많은 이들은 닌텐도의 게임보이 컬러 버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SNK VS CAPCOM’의 화제성으로 반짝 인기를 얻은 네오지오 포켓으로서는 이 아성을 무너뜨리기가 어려웠었다.
결국, SNK는 흑백 버전 네오지오 포켓의 실패, 그리고 하이퍼 네오지오 64라는 새로운 기판의 실패로 인해 경영이 악화되어 회사 자체가 존속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결국 2001년에 ‘SNK VS CAPCOM 카드파이터즈 2’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된다.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한 하드웨어 네오지오 포켓. 그러나 ‘SNK VS CAPCOM’을 비롯한 명작 격투게임과 색다른 장르의 SNK의 게임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많은 인디 레이블을 거느리고 있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정도면 성공한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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